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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지 않아도 괜찮아

by 쪼이



나는 진성 내향형 인간이지만, 소개팅이나 각종 소모임 등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ENFP로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분위기를 띄우려고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리액션을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는 재미중독자인 내가 사람들과의 모임에서도 ‘재미’를 추구하는 탓이다. 모임 자리에서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고 정적이 흐르면 나는 그게 마치 내 과실처럼 느껴진다. 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즐겁게 웃는 것이 일상에서 내가 추구하는 성공적인 모임이다.

우리 부서는 현재 9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나만 여자고 내가 제일 어리다. 처음 조직개편이 이루어졌을 때, 한 지인이 이런 우리 조직의 구조를 보고 한마디 했다. 남자들 사이에 여자 막내를 넣는 것이 나름 효과적인 조직 구성이라나? 홍일점은 왠지 모르게 홍일점으로서의 역할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말수가 많지 않은 내향형 부서원들 사이에서 나는 내 역할이 발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의 정적이 싫어서 짐짓 더 밝게 대화화제를 꺼내곤 했다. 마찬가지로 내향형 인간인 나로서는 나름 노력하는 거였다.

가끔씩은 그런 내 역할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번 주는 유독 피곤한 한 주였다. 왠지 모를 몸살 기운이 있는 듯했다. 그 와중에 진행하고 있는 업무에 대해 그룹장님과의 의견 충돌이 있어서 또 괜히 마음이 꽁기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있을 때는 부서원들과 같이 밥을 먹는 것도 피곤하다. 그냥 조용히 따로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동기 단톡방에서 친한 동기언니 둘이 점심을 같이 먹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도 부서에 따로 밥을 먹겠다고 말한 뒤 언니들한테 합류했다.

평소에는 대화 화제를 이것저것 꺼내는 나였다. 대화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다. 그런지만 그날은 피곤한 나머지 그냥 언니들의 대화 흐름을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뒤늦게 내가 낀 자리이므로, 나 없어도 둘이서 할 얘기는 많을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언니들은 별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별다른 화제 없이 이따금 몇 마디 툭툭 던지는 터라 식사를 하는 내내 정적이 가득했다. 평소라면 이 자리를 나는 재미없다고 느끼고 조바심을 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문득 그 정적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굳이 목소리를 내거나 대화를 이으려고 애쓰지 않고 그냥 가만히 흐르는 시간을 지켜보는 그 순간이. 그 둘은 원래 둘이 자주 점심을 먹는 각별한 사이였다. 내가 생각하는 친한 친구란 같이 있으면 항상 즐거운 사이였는데, 그들에게는 이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였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점점 정체성과 가치관이 확실해지면서 나는 삶에서 '재미'가 나한테 굉장히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은 재밌기 때문에 살아갈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혹은, 무릇 더불어 사는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미'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미'와 '의미', 그게 내 삶의 방향성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삶의 다른 모든 것들을 대하듯,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재미’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미’란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는 도파민 터지는 순간이고, ‘의미’란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서 유대를 쌓는 순간이었다. ‘재미’와 ‘의미’가 둘 다 없는 만남을 나는 실패한 만남으로 여겼다.

남자친구와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도 이는 내게 가끔 의문으로 다가왔다. 연애경험이 별로 없던 게 남자친구와 만나는 일은 또 다른 범주의 만남이었다. 나의 대부분의 만남은 목적이 있었다. 근황을 나누기 위해서, 특정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게임을 하기 위해서... 하지만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만남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었다. 이 만남에서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재미? 의미?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 중 깔깔거리며 웃거나 깊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일부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평온하고 잔잔하고 소소했다. 진정 잘 맞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재밌다는데, 우리는 잘 맞는 게 맞나? 연애경험이 별로 없는 나는 그런 것들이 가끔은 불안했다. 장기연애를 하고 결혼을 앞둔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잘 맞는 게 뭐라고 생각해? 너넨 계속 잘 맞고 재밌었어? 그런 나에게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딱히 뭐 같이 하지 않고 각자 핸드폰만 보고 있더라도, 그래도 같이 있는 게 좋더라구.

그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쩌면 내가 인간관계를 버거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수도 있겠다. 나에게 관계는 늘 노력해야 하는 거였다. 타고난 에너지 준위가 높지 않아서일까,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 나의 큰 가치 중 하나여서일까. 그렇게 노력하는 나 자신도 너무나도 기특하지만, 한편으로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게 늘 피곤했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더 모임과 관계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소극적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냥 한 공간에 있다는 것,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그걸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도 많은데 말이다.

편해지자. 관계를 유지하고 만남을 이어가는 것에 내 책임과 부담을 내려놓자. 예전에, 너무도 좋아하는 한분께서 내게 인사를 건네셨다. “가끔씩 오래 보아요.” 그 말에 나는 왠지 모를 위안을 느꼈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줄 알았다. 내가 은연중 가지고 있던 그 부담을 덜어주는 말이었다. 가끔씩 보아도 좋고, 정적이 흘러도 좋고, 항상 재밌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노력할 필요 없는…. 그냥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슴슴한 관계들이 내게 더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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