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완 Feb 16. 2022

<파워 오브 도그> - 유구한 거세의 공포

* 이 감상은 작품의 전체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아직 시청하지 않은 독자는 각별한 주의를 요함.



때때로 우리는 작품 바깥의 증명에 근거해 콘텐츠를 고른다. 이번 영화가 그렇다. 아카데미 은사자상을 받았다. 아카데미가 뭐냐면 영화를 멋지게 만들면 주는 상이다. 누구 맘에 들게 멋져야 하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소한 우리 언니 마음에는 든 것 같다. 언니가 추천해 주었기 때문이다.


배경은 서부 시대. 서부 시대라니까 당연히 미국이다.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잠드는 필과 조지 형제. 필은 지저분한 가죽 옷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꼿꼿한 걸음과 거친 언행을 두른 이른 바 마초 스타일이다. fatso니 뭐니 형에게 조롱당하는 동생 조지는 말끔하게 정리된 얼굴에다 느릿느릿한 말투와 둔한 덩치를 가진, 어딘가 만만한 남자다. 필은 척 보기에도 조지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초반부에서 나타나는 필의 관심은 오로지 말 아니면 조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둘은 초장부터 충돌한다. 필은 기념일에 직접 사냥을 해다 고기를 구워 먹고 싶은데 조지는 허름한 식당으로 간다. 분명 누구 하나, 아니면 둘 다 참고 있는 관계가 이들 형제이다.


초라한 식당에는 의사였던 남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 과부가 된 로즈와 그의 연약한 아들 피터가 지낸다. 피터는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를 자르거나 하며 논다. 이들 모자의 식당은 피터가 만든 섬세한 종이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필과 조지 일행이 앉은 식탁에도 예쁜 유리병에다 몇 송이 꽂아 두었다. 필은 그 꽃을 가져다 대놓고 라이터 불을 붙이거나 물에 처박거나 하며 피터를 조롱한다. 팔에 행주를 두르고 있는 모습조차 남성적이지 못하다며 멸시한다. 상처 받은 피터는 놀랍게도 그날 저녁 바깥에서 훌라후프를 하며 기분을 푼다.


로즈까지 옆에서 줄넘기를 했다면 영화가 조금 무서워졌겠지만(일상적이고 뜬금 없어서 오히려 기묘해 보이는 연출은 대부분 <송곳니>를 떠올리게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즈는 부엌에서 혼자 운다. 그걸 지켜보던 조지는 소심하게 필을 탓하면서도, 너 때문에 울잖아 새끼야 등등 대놓고 지적은 못 하고 다음 날 로즈의 식당 일을 돕는다.


그렇게 둘은 사랑에 빠지고 집을 합친다. 피터는 부유한 목장주인 조지의 도움으로 기숙사가 붙어 있는 의학 대학에 간다.


그리고 합친 집에는 필이 있다. 로즈가 조지의 집에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필은 시종일관 로즈를 경멸하고, 첫 대면부터 어디 앉으라는 말도 없이 기분 나쁘게 비꼬기만 한다. 모 아이돌 노래 속 미친 아주버님처럼, 둘 사이를 질투해 심술을 부리는 걸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필은 로즈와 조지 사이를 질투하긴 하지만, 조지가 아니라 로즈에게 질투를 느낀다.


풍경이 탁 시원하게 트인 어느 절벽에서 조지와 로즈는 춤을 춘다. 로즈가 리드하고, 조지가 따라 스텝을 밟는다. 그러다가 조지는 눈물을 흘린다. 로즈가 왜 우느냐고 묻는다. 조지는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어서, 라고 한다. 조지는 필에게 전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지에게 필은 뭘까? 그리고, 만난지 얼마 안 된 새 남편의 눈물을 닦아준 바로 다음 그의 형이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목격한 로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셋이서 함께 살고 나서부터 이런저런 해프닝들이 생긴다. 대부분 필이 로즈를 불필요한 말 한 마디 없이 아주 심플하고 세련되고 그렇지만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찍어 눌러서 생긴 사건들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남편 때문에 술은 입에도 대지 않던 로즈는 결국 남편처럼 술로써 피폐해져간다. 보면서 무척 불쾌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로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그러나 방학을 맞이해 기숙사에서 돌아온 피터의 등장 이후로, 상황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노골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시사하는 이야기였다. 프롱코의 안장, 밧줄, 가죽, 손수건. 그가 남긴 모든 기억들과 비밀스럽게 가둬둔 남성의 육체를 향한 갈망을 필은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얼굴을 뒤덮은 수염도 어쩌면 그가 가진 본성을 남성성으로 가리려는, 일종의 커튼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커튼은 결국 마지막, 장의사의 손에 면도되어 걷힌다. 필이 필사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성성이 거세되는 장면이다. 수염을 빼앗긴 필이 머리를 올리고 멀끔한 옷을 입은 채 관 속에 누워 있는 장면은 지나치게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죽기 전 밧줄을 완성하였고 그것을 피터에게 전해주리라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어느 정도는 안식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그가 죽어 떠난 뒤의 세계에 남아 있다. 로즈와 조지의 먼 곳에서의 키스가 그 증명이다. 모든 일을 조작한 피터는 집의 높은 창가에서 온화하게 풍경을 내려다 본다. 며칠 만에 삼라만상을 완성한 신처럼 묘하게 뿌듯한 웃음을 짓기도 한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신은 개의 세력을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무찔렀다. 어떤 변수라도 계획을 망칠 수 있었으나 애초에 피터에게는 계획이 없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모든 상황이 기회이기도 했다. 결국 그것이 신의 조화가 아니라면, 애초부터 피터가 필을 사로잡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무슨 이야기였나? 나는 이것을 여성의 영역에 침입하여 조롱하고 모든 것을 짓밟은 남성이, 남성 그 스스로가 약점이 되어 정의를 구현당한 권선징악 이야기라고 하겠다. 예컨대 로즈의 남편 같은 경우에도, 술을 즐겼다는 묘사가 나온다. 필의 괴롭힘에 고통을 호소하는 로즈에게 담담히 위로를 건네는 피터의 모습도 지나치게 익숙해 보인다. 피터는 이미 로즈를 한 번 구한 것이 아닐까? 성경의 해당 부분은 이미 과거에 한 번 읽어진 전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옛날부터 남자들은 거세 당하기를 두려워 했다. 이것은 신체 결손에 대한 공포라기보다 생식기능의 상실, 남성성의 상실이 주는 무능력함에 더 가깝다. 즉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성기는 쾌락보다 공포에 맞닿아 있다. 그러한 공포가 더 거칠고 천한 것으로 가려지기 위해 약자를 공격하게 됐다. 그리고 가장 가깝고 만만한 약자가 여성이었다는 논리다.

매거진의 이전글 양귀자 <모순> - 단지 몇 번 찔'렸'을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