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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완 Jul 01. 2022

<탈춤은 탈춤> - 국악으로 만져보는 현재의 삶

2022. 6. 29. 대전시립연정국악원

*극 중 내용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음.




6월 29일, 대전연정국악원에서 열린 <탈춤은 탈춤> 공연. 이 무대를 알게 된 것은 또다른 국악 공연에서 배부된.어느 한 팜플렛 속에서였다. 붓으로 덧칠한 것만 같은 포스터가 어쩐지 예전에 인상 깊게 보았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포스터와 닮아 있어서 무심코 눈길이 갔다. <굿 세워라 금순아>에서 금순이가 마침내 굿을 세웠는가 안 세웠는가는 해당 편에서 다루도록 하고, 그럼 누가 무대에서 뛰놀았는가부터 살펴보자.


국악에 문외한인 나는 관련 정보를 찾으려고 해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 중에 분명 고성오광대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검색해보면 정가악회 콘서트라고 나온다. 정가악회는 뭐고 고성오광대는 뭐람? 우선 오광대놀이는 탈을 가지고 하는 탈놀음인데, 전남 고성에서 하는 오광대놀이라 하여 고성오광대가 되었다. 정가악회는 2000년에 창단된 전통음악 연구 및 창작활동 모임이라고 한다. 아하! 그러니까 <탈춤은 탈춤>이란 정가악회가 고성오광대에 현대적인 미감을 더한 공연이란 것이군. 이걸 공연 볼 때 알았더라면 작중 대사 속 '고성'이 '오래된 성'이 아니라 '전남 고성'이라는 사실을 한번에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무대는 해가 떠오르며 시작된다. 공간의 중심을 장악한 스크린이 새벽녘 칼로 가른 밀감빛에서 리라빛으로 변할 때까지, 상여를 짊어진 흰 소복 무리가 탈을 나눠 가지고 인사를 하고 절을 한 뒤 떠난다. 이윽고 해의 형태가 완전히 사라지면, 양반춤이 시작된다.


1. 양반춤

양반탈을 쓴 다섯명의 인물이 무대로 나와 춤을 춘다. 오방색에 따라 도포를 입은 채 옷자락을 흩날리며 춘다. 황색 도포를 입은 양반이 가운데서 중심을 잡고 각각 흰색, 검은색, 푸른색, 진달래색 도포자락들이 현대적인 비트에 맞추어 원을 그리다가 부채를 휘두르곤 때때로 주저앉기도 한다. 한편 스크린에서는 현란한 콜라주 영상이 재생된다. 새빨간 딸기에 악귀를 쫓는 무시무시한 무속탱화들. 그 앞에서 복잡한 기교 없이 단순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작들은 고아한 백로떼 같다.


2. 황봉사

보수적인 사고방식으로 국악을 생각하고 있던 내게 충격적이게도 마스크를 나눠주는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바가지에 물을 떠다 솔잎을 적셔 물방울을 뿌리기도 한다. 위생적이고 다정한 후룸라이드를 탄 것 같고, 냉담자가 된 지금에서야 아이러니하게도 성수를 맞는 기분이다. 그래서인가 마스크를 줬다 뺏다 약올리는 탈 너머 눈빛에 가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대에서는 황봉사가 뱅글뱅글 갓을 돌리며 시선을 유도하는데, 무대 밖에서는 두 사람이 객석을 돌아다니며 집중력을 흩뜨린다. 얄궃은 걸음걸이에 눈길을 빼앗기다보면 어느새 무대 공중을 가로지르는 금줄이 탁 떨어지고 암흑이 찾아온다. (결국 마스크는 받지 못했다..)


3. 승무

스크린 앞에 무당이 나타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멀기도 멀거니와 기묘한 신성력 같은 것이 단지 앉아 있는 자태만으로도 관객들을 위축시켜 혹시 홀로그램은 아닌가 몇 번 눈을 깜박여본다. 이윽고 북청사자가 느릿느릿 걸어나온다. 두터운 가면을 캐스터네츠처럼 부딪쳐 딱! 소리를 내면 사자가 으르렁 짖는 모습이 연상된다. 곧이어 무당이 천을 휘날리고 살풀이를 시작하면, 시뻘건 조명 아래 북청사자가 두두두 달려나온다. 공포스럽기 짝이 없다. 씰룩거리는 엉덩이에 자유자재로 돌아가는 고갯짓이 너무 귀엽다고 하고 있으면 마치 자길 고양이로 착각 말라는 듯 사자가 우렁차게 여러 번 짖고 위협적으로 발짓한다. 승무가 시작할 때 나온 영상 속, 흰 배경을 천천히 적시는 검은 물감 한 방울. 끝날 쯤 되어서야 색이 반전되어 이번에는 흰 물감이 검은 배경을 뒤덮는다. 음이 양을 삼키고 양이 음을 삼키는 부조리한 조화를 흰 옷 입은 무당과 북청사자가 이뤄내며 끝이 난다.


4. 문둥이

끊길 듯 말 듯 가련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불로초로 술을 빚어... 국화 한 송이를 앞에 두고 주저앉은 문둥이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꺼이꺼이 곡을 한다. 빛으로 가득 차 일렁이는 출구로 문둥이가 절뚝 절뚝 걸어가면, 스크린에 한 문장이 뜬다. '오늘도 2.5명의 노동자가 퇴근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때 구독했던 철학공동체 <전기가오리>에서 자주 노동자 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그저 책 너머 이야기 같았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 소송 사건이 유구한 극의 개연성을 뒷받침해준다는 것이 그 어느 춤사위보다도 우스꽝스럽다. '트라우마'란 누구의 것인가? 결국 '트라우마'조차 기득권 지식층의 전유물이 되어야만 하는가? 여타 다른 이유는 못 본척하면서 유독 꼬박꼬박 '전국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승하차 시위로 인해 4호선 양방향 열차 운행에 지연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운운하는 서울교통공사는 또 어떤가. 문둥이의 뒷모습을 보라. 그는 절뚝거리며 계단을 오르면서도 손에 든 국화 한 송이의 무게를 끝까지 견디어냈다. 그들도 그렇다. 힘겹게도 국화 한 송이를 지켜내고 있는데, 잃을 것만 많고 얻을 것 없는 인간들만 자리에 앉아 낄낄대고 있다. 타인의 인권을 조롱하는 그들의 '트라우마'는 자기성찰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겪는 일조차 사치가 아닐까? '청소노동자 시위'도, '장애인 지하철 승하차 시위'도 또 그밖의 모든 투쟁도 거룩한 인권 수호활동의 일환이다. 청소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씻을 권리, 쾌적한 환경에서 노동할 권리를 보장하라.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보장할 수 없는 자리에 있다면 동참하라. 그것도 아니고 그저 에어컨 아래에서 책이나 읽을 줄 아는 멍청이라면 차라리 입이나 조용히 다물어라.


5. 비비와 사자

분위기가 발랄하게 전환된다. 영노라고도 하는 '비비'가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관심을 끈다. '나는 비비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북청사자가 다시 등장한다. 둘이서 재치있는 몸짓으로 옥신각신하다가, 비비가 본론을 꺼낸다. '다들 나보고 만들다 만, 되다 만 사자라고 한다. 나는 비비인데... 아무도 내가 비비인 것을 모른다. 어쩌면 좋느냐?' 사자는 단순명쾌하게 대답한다. '나는 비비다, 하고 외쳐라! 너는 너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도 네가 아니다. 너는 비비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네가 비비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집에 와서 따로 찾아봐서야 '비비'가 무엇인지 알게 된 나조차도 객석에서 음 그래 너는 비비구나 하게 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논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논리적이다. 원래 철학이란 그런 것인가? 이 철학가 북청사자의 말을 듣고 비비는 자신있게 외친다. '나는 비비다...!' 실제로도 그렇다. 자기가 여자를 좋아하건 남자를 좋아하건, 어느나라 사람이건 누구의 자식이건, '나는 나다.'라는 말 한 마디로 당신은 당신이 된다. 자아찾기 여행 25년째인 나로서는 조금 눈물이 났다.


6. 말뚝이

말뚝이들이 채찍을 들고 나와 춤을 춘다. 채찍을 휘두르고 땅에 때려박고, 각도를 바꾸어 점멸하는 조명 아래서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이 주인인 양 당당한 몸짓을 과시한다. 맨 앞 가운데 자리(요즘 함께 국악 투어중인 언니 표현으로는 '앞니 자리')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조명이 규칙적으로 나를 환하게 비출 때가 있어서 사실 몸이 꼿꼿이 굳은 채로 감상했다. 하지만 조명을 가득 받으면서 어쩐지 내가 그들과 함께 무대에서 춤을 추는 말뚝이가 된 기분이 들고, 이상한 고양감과 동질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후반부가 되어 나는 빛이 달려들어도 손발에 힘을 풀고 편안히, 춤바람에 몸을 맡긴 말뚝이처럼 있을 수 있었다.


모든 탈 이야기가 끝나면 고성오광대 선생님들이 등장한다. 성별도 나이도 구분 없이 모든 춤꾼들이 섞여 춤을 춘다. 새하얀 옷과 새하얀 머리카락, 새하얀 옷과 새까만 머리카락. 또는 밝게 물들인 머리카락. 커다란 귀걸이. 땀에 젖은 이마. 모든 것이 춤이 된다.


<탈춤은 탈춤>을 감상하고 나오는 길에 사고가 난 차량을 보았다. 나는 그걸 아무 느낌도 감상도 없이 지나쳤다. 이상한 일이다. 있는 힘껏 교감하고 즐긴 후에 그 기분을 그대로 집까지 가져갈 수가 없다니 말이다. 좋았던 기분들이 공중으로 증발된 것 같아 허무해지려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없어진 게 아니라 공연장에 두고 왔지 참. 다음에 찾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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