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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Oct 24. 2024

레드 콤플렉스 3화

어머니와 ‘누군가’ 사이(3)

결국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고 약 2주 후에야 나는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축구부원이 됐다. 의외로 험난한 과정을 거친 탓에 아버지는 내 축구부에서의 첫 훈련을 무슨 큰 경사라도 되는 듯이 반겼다. 이렇게나 소란스럽게 시작한 축구이니만큼 분명 큰일을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언뜻 단순한 징조가 아니라, 혼란의 중심에 놓일 정도로 대단한 내 실력을 증명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보였던 것 같다. 내가 국가대표라도 된 듯이 호들갑을 떠는 아버지의 반응에도 많은 주변인들은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는 내 첫 훈련을 기념하기 위한 조촐한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할머니, 삼촌들, 고모들, 그리고 어머니와 나는 동네 갈빗집에 모였다. 아버지는 곧 고속도로를 내달려 급히 자리에 합류할 계획이었다. 우리가 갈빗집에 자리를 잡기 위해 집을 나서기 직전, 아버지는 천안 근처의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금방 갈 테니 먼저 먹고 있으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훈련은 힘들지 않았느냐고, 첫 훈련을 잘 끝냈으니 다행이라고, 금방 달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굳이 나를 바꿔 달래서 힘주어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가던 그 목소리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날 아버지는 갈빗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교통사고 예방 표어처럼, 흥분한 아버지는 10분이라도 빨리 집에 오려다가 수십 년은 이르게 대기권 너머의 아주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가 오지 않자, 갈비 값을 누가 낼 것인지 몰라 당혹스러워진 가족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감싸 안으며 내 귀를 막은 채 한참을 흐느꼈고, 나는 숨이 막혔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견디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너무도 일찍 나를 떠난 아버지. 너무도 일찍 홀로 남겨진 나,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의 품에서 나는 그렇게 우리의 달라진 현실을 깨달았다. 부둥켜안은 모자의 모습은 분명 겉보기에 동일한 슬픔으로 뭉쳐진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을 테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나를 가두고 흐느끼는 어머니나, 산소와 단절된 채 상황을 곱씹어 이해하려 애쓰는 나나, 완전히 맞닿은 가슴과 가슴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그로 인해 이제 온전히 지구 한 바퀴를 채워버린 등과 등 사이의 거리로 서로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같은 사람을 잃은 게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누군가’가 아닌 사람들과 연결고리가 되어준 그가 없어지면서 둘 다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나, 어머니. 그러나 앞으로 우리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견뎌야 할 시간들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었다.


과연 이 상태로 우리가 그 긴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였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현 상황을 개선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 여자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 내게는 이제 이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손도 닿지 않는 먼 곳에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엄마’는 잊어야 한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제는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버스 정류장에서 어머니는 담배 한 대를 더 태웠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갈 버스는 담배 한 대가 다 타도록 오지 않았다.


지루했다.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옆을 지키고 서 있는 일은 꽤나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들이 오가는 도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돌려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의 간판을 바라보았고, 그러다 지나치듯 어머니의 얼굴로 잠시 눈길을 주었다. 초겨울의 빛깔 좋은 볕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아름다웠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느꼈던 인상 그대로, 앳되고 참해 보였다. 눈과 코와 입과 귀가 모여 자리 잡은 물리적인 모양새는 그랬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인지 눈꺼풀이 내려와 눈은 게슴츠레한 상태로 힘겹게 길 끝을 향해있었고, 어느새 눈, 코, 입이 끝나는 지점마다 잘게 패이기 시작한 주름은 초겨울 볕에 숨은 한기를 느끼는지 이따금 작게 떨렸다.


십년 전의 인상이 아직 다 가시지도 않은 얼굴에 익숙하게 내려앉은 그녀의 오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예전의 그녀를 느끼는데, 왜 지금 그녀의 얼굴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언제부터 그녀의 오늘이 이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그만 들어가. 학교 밖에 있어서 좋을 거 뭐 있다고.”


십년 전의 그녀와 오늘의 그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마저 십년 전 나를 대할 때의 어색함과 지금 나를 대할 때의 익숙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녀가 흔들리고 있었다.


“버스 타는 것만 보고 갈게요.”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니는 내 말에 곧 다시 길 끝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이 내게서 떠난 것을 확인하고, 억지로 올린 입 꼬리를 내렸다. 뿌듯했다. 잘 했어. 전혀 웃음이 나지 않는 기분과 어머니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의 어색함을 이겨내고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일 수 있었던 내가 자랑스러웠다. 내 웃음이 어쩌면 아버지가 떠나던 날 우리 둘이 했던 무언의 계약을 지켜내지 못해 힘들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었을까.


버스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한 번 나를 돌아보며 ‘갈게’라고 말하고는 버스를 향해 다가갔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녀가 걱정이 된 나는 그녀가 버스 안으로 오른 발을 올리는 순간 부러 명랑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어머니는 뒤를 돌아보며 말없이 웃어보였다. 너무도 자연스럽지 못한 그녀의 미소. 그러나 나는 그 미소에도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힘을 내려한다. 물론 그녀는 돌덩이처럼 굳어 무거워진 마음을 완전히 풀어버릴 수는 없을 테지만, 오늘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마음 여린 어머니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어머니가 앉아있는 쪽 창문을 향해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도 얼굴 옆으로 작게 손을 흔들었다. 조금 전보다 한 결 자연스러워진 미소를 지으며. 빛깔이 고운 초겨울의 볕이 유리창을 뚫고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따스하고, 온화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버스가 출발하면서 볕은 조금씩 그녀의 얼굴에서 벗어나 버스의 꼬리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이내 신기루처럼 버스의 꼬리 끝에서 펑, 하고 사라져버렸다. 


모든 게 하나의 환상처럼 사라졌다. 텅텅 빈 버스도, 십년 전의 아름다운 어머니도, 오늘의 애처로운 어머니도, 질 좋은 초겨울의 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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