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의 지하철(1)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를 태운 버스가 길 끝으로 사라진 직후였다. 어머니마저 시야에서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늦가을의 질 좋은 볕도 부서져 사그라들었다.
대신 도시에는 바람이 불었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거친 기계음과 바쁘게 길을 달려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를 비집고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바람의 소리는 순식간에 도시를 가득 채웠다. 어쩌면 그것은 나와 도시의 사이를 메운 것인지도 몰랐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우울한 바람의 소리, 그리고 차가운 기운이 나와 도시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래서 문득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바람이 나를 세계에서 떼어내려 애쓰는 듯한 느낌이었다.
곧 5교시가 시작될 무렵이었지만, 학교는 가지 않았다. 축구와 인연을 끊고 나니 그곳은 이미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교실 귀퉁이에서 홀로 창밖을 향해있던 작은 섬은 교실이라는 영토와 학교라는 대륙을 벗어나 마침내는 세계와 분리된 무언가가 되어 먼 바다로 밀려났다. 해저 깊숙한 곳과 아슬아슬하게 닿아있던 뿌리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제 아무 것도 부유하는 섬을 잡지 못했다. 그렇게 섬은 온 몸을 둘러싼 차가운 해류를 따라, 기약 없는 수평선을 향해 힘없이 흘러갔다.
이대로 흘러가다 보면 어딘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 세계에서 조금씩 멀어지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흘러가야 할 먼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길의 끝은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과 고르게 자리 잡지 못한 건물들에 가려져 있었다. 막막했다. 막막해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허리가 휜 담배를 입에 물고,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밖으로 빠져나온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흰 연기가 바람을 타고 도시 속으로 흘러갔다.
빠르게 내게서 멀어져 가는 담배 연기. 나는 담배 연기보다도 하찮은 존재였던 것인지, 나를 버린 세계는 어렵지 않게 담배 연기를 받아들였다. 교복을 입고 담배를 태우는데도, 길을 걷는 이들은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나의 존재가 더욱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 잠시 멈춘 사이 거세진 바람이 볼을 때렸다. 세계에서 나를 완전히 분리하는데 성공한 바람은 더욱 기세가 올라 먼 바다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흐르듯 도시를 헤매던 걸음이 어느새 지하철 역 부근에 닿았다. 그 즈음 담배 한 개비는 필터 바로 앞까지 타들어 갔고, 여전히 바람은 거셌다. 고단했다. 차가운 해류에 휩쓸려 세계에서 멀어지는 일은 제법 힘든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내 몸은 아무런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지하로 향했다. 바람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섬 하나가 익숙한 움직임으로 지하로 숨어들었다.
오후 2시의 지하철 역은 한산했다. 아무 생각 없이 통과한 개찰구 너머도 마찬가지였다. 거짓말처럼 텅 빈 지하 세계. 행인 1, 2, 3으로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무리가 되지 않을 만큼 소수의 사람들이 텅 빈 세계의 엑스트라가 되어 멍하니 눈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들이어서, 다들 어쩐지 나처럼 세계에서 버려진 사람들 같았다.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먼 우주 어딘가의 우주 정거장처럼 황량한 플랫폼. 우주를 떠도는 세계의 엑스트라들이 소문으로만 듣던 안드로메다로 떠나기 위해 은하철도 999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대편 선로에 열차가 나타났다. 희뿌연 빛깔의 경적 소리가 나직이 깔리며, 플랫폼에 바람이 일었다. 눅눅하고 텁텁한 바람이 얼굴을 쓸었다. 지상의 바람과는 다른 빛깔, 맛, 냄새였다. 사람들의 눈꺼풀이 떨리고, 얼굴 한 쪽이 바람에 부대껴 찌푸려졌다. 별 수가 없어 온 몸으로 바람을 견뎌내는 것처럼 우리는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반대편 선로에 나타난 열차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침 누군가 무심결 흘린 것인지 바닥을 뒹굴던 종이 쪼가리가 공중에 떠올라서는 바람이 그친 이후에도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반대편에 들어온 지하철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쪽 선로에 지하철이 들어왔다.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지하철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어기적거리는 그들의 걸음걸이를 따라 나도 몸을 일으켰다. 몇 광년의 거리를 달려온 열차 안의 공기가 바깥과의 압력 차에 긴장한 것인지, 뻑뻑한 느낌으로 출입문이 열렸다. 생존 본능일까. 분명히 지하철 안에는 빈자리가 넘쳐 났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운 없는 표정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분주히 빈자리를 찾아 앉기 시작했다. 놀라울 만큼 활기차고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정말 버려진 것은 나뿐인 모양이었다. 아직 그들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나만이 여전히 어기적거리며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드로메다 따위는 없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들어 통화를 하고, 휴대용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다.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2분에 한 번, 아무리 광속이라고 생각해도 지나치게 짧게만 느껴지는 시간의 간격으로 문이 열릴 때마다, 무릎 위에 놓여있던 물건을 들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아무도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기 위한 동작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통화를 하고,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책을 읽던 이들도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끼워 세계와 세계를 연결했다. 그들에게는 지하철이 출발하기 전의 세계도, 지하철 안의 세계도, 지하철에서 내려서 만난 세계도 다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도시를 돌고 도는 순환선 열차. 내가 안드로메다의 희망을 걸고 기다렸던 이동 수단의 정체란, 사실은 그런 것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몇 차례인가 문이 열렸고,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오거나 나갔다. 그들의 바쁜 걸음소리와 나른한 목소리가 뻑뻑한 출입문으로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지상에서 헤맬 때보다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틈에 숨어 그들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는 데에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 정해진 목적지를 두고 내릴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끝을 모르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내 존재가 너무 눈에 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이 멈추면 세계의 바람이 잠시 열린 출입문 근처에 머물렀다. 그때마다 그가 내 존재를 알아채고 다시금 나를 분리해내기 위해 달려들까 겁이 났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평균 2분에 한 번씩 어깨를 움찔하기를 반복하며 나는 불안해했다.
결국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나 나는 지하철에서 내리기 위해 눈을 떴다. 갈 곳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았다.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곧 문이 열릴 것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는 듯 나와 눈이 마주친 후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상한 눈빛이었다. 그 눈을 보고 있으니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에 빠져있는 것인지 조금은 멍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따스했다. 그 따스함에 일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온 몸이 노곤해졌다. 내 것과 같은 붉은 색 이스트 백을 들고 있던 그녀. 이스트 백은 흔했지만, 흑백과도 같은 사위 안에서 그 붉은색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