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Delight(2)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이라는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확률은 희박했고, 모든 것은 확신할 수 없는 우연에 달려있었다. 기적은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매일같이 그녀를 기다리던 나는 지쳐갔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플랫폼은 다시 안드로메다 행 열차가 들어오는 우주 정거장이 되었다. 지하철 출입문이 열리면서 슬며시 들어온 바람이 근처를 어슬렁거릴 때면 위조된 신분증을 품은 우주 미아가 된 것 같은 심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외롭고, 춥고, 두려웠다.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줄어드는 듯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위로는, 치유의 음악은, 한 남자가 부른 Delight는 그곳에 없었지만, 여전히 늘 같은 시각에 지하철을 탔다. 이제는 위로가 아닌,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아 지하철에 올랐다. 인생은 기적이 있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위로는 희망이 되었고, 나중에는 희망이 습관이 되었다. 1년 동안 Delight에만 매달렸던 남자처럼, 오후 2시의 지하철은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
Delight를 다시 듣게 된 것은 그녀를 만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지하철을 타고 도시를 한 바퀴 돌고난 후 지상으로 나왔을 때, 눈앞에 작은 음반 가게가 있었다. 매일같이 지나치던 곳이었지만 그 동안의 나는 단 한 번도 그곳을 눈치 채지 못했다. 늘 지상에서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목을 움츠리고 먼 길 끝으로만 눈을 둔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바람이 불지 않았다. 공기는 건조했고, 잠이라도 든 것처럼 평온했다.
늦가을이 초겨울로 이름이 바뀌는 사이 잠시 바람도 더 거세지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진짜 이유야 어찌되었든 내게는 그것이 도시의 배려로 느껴졌다. 모처럼 나는 그 덕에 움츠린 몸을 펼 수 있었고, 숨어있기라도 한 듯 전혀 눈에 띄지 않던 도시의 Delight가 눈앞에 나타났으므로.
가게에 들어가 주인에게 더더를 물었다.
“CD요, 테이프요?”
그가 되물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 테이프라고 대답했다. 카운터에서 돌아선 그는 진열대 어딘가에서 <It's you>가 타이틀곡인 2집을 찾아 건네주었다.
“저, 이게 아니고 Delight가……”
그 사이 2집이 나온 줄 몰랐던 나는 약간 당황해 말했다. 그 탓으로 목소리가 너무 작아진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되물어왔다.
“네?”
“Delight 들어있는 거요.”
약간 힘을 주어 말하자, 그제야 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왼쪽 벽의 진열대로 다가갔다. 조금 귀찮은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더더의 1집 테이프를 찾아주었다.
오천 원이요. 덤덤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냈다. 거의 동시에, 나의 지폐는 그의 손으로, 그의 테이프는 나의 손으로 옮겨졌다. 3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고, 더더와 CD와 테이프와 Delight와 물음표가 붙은 ‘네’, 그리고 오천 원, 단 여섯 개의 단어가 무심하게 오가는 간단한 과정이었다. 도시의 Delight를 손에 넣는 일은 깔끔하고, 간편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Delight는 그녀의 워크맨으로 들었던 Delight와는 많이 달랐다. 기타 하나와 드럼만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Delight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마치 나 대신 라이트 윙 포지션을 차지한 라이벌의 드리블과 크로스를 보는 것 같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세련된 목소리와 정교한 연주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들었던 도입부에서는 어둔 밤하늘에서 빛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하이라이트는 그야말로 완성된 환희였다. 산뜻하고, 몽환적이며, 촉촉한 박혜경의 목소리는, 찬란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Delight스러웠다. Delight- Delight in my heart. 그녀는 자연스럽게 발음하는 것만으로 능숙하게 그 단어가 뜻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훌륭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이전에 몇 번이나 그들의 Delight를 들었음에도 어떻게 그 곡의 매력을 깨닫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Delight는 뭔가 부족했다. 물론 그것은 그녀의 워크맨으로 들었던 곡보다 분명히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곡이었다. 그런데 나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그 곡을 들으면 분명 마음이 편해지고, 가끔은 행복해지기도 했지만, 허전했다.
그것은 위로와는 조금 결이 다른 경험이었다. 음악에 빠져-세계와, 나와, ‘서울에서 오키나와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먼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 같은 무수한 상념들을 잠시 잊는 것에 불과했다.
첫 날, 열두 번 정도 집에 있는 오래 된 카세트로 Delight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실망할 필요 없어. 당연한 일이잖아. 매우 단순하고, 일상적인 과정으로 ‘구매’한 도시의 Delight가 그야말로 신기하고도, 놀랍고도, 기적 같은 사건으로 내게 ‘다가왔’던 그날의 Delight와 같을 리 없었다.
테이프를 사고 일주일쯤 지나 어머니를 졸라 워크맨을 장만했다. 딱 일주일이 되던 날, 어머니에게 워크맨을 사달라고 말했고, 이틀 뒤에는 결국 워크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조른 것은 처음이었다. 안방에서 TV를 보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일을 끝내고 돌아온 어머니와 마주하자,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워크맨을 하나 갖고 싶어요. ‘무엇을 사야해요’, 혹은 ‘필요해요’와는 전혀 다른 그 한 마디가 낯설고, 어려웠다.
“무슨 할 말 있니?”
고맙게도, 평소와 다른 어떤 분위기를 감지한 어머니는 내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그렇게 물어주었다.
“워크맨이…….”
끝내 ‘갖고 싶어요’까지는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끝이 허물어질 때, 어머니의 얼굴이 잠시 무거워졌다. 마치 열 살의 나이를 한 번에 먹고 늙어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다음 날, 어머니는 내 손에 십만 원을 쥐어주었다. 축구를 그만둬야 했던 의붓아들을 위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고마웠다. 새 제품을 사려면 최소한 20만 원은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그 때문에 삼만 오천 원짜리 중고 워크맨을 샀다. 사실 3만원짜리 제품을 사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오천원 더 비싼 그 워크맨은 붉은 색이었다. 촌스러웠지만 왠지 그게 마음에 들었다.
디지털 액정 리모컨은 없었고, 본체의 플라스틱 버튼을 누르면 부드럽게 감기는 느낌 대신 거친 길을 달리는 느낌으로 되감기가 실행되는 구형 워크맨이었다. 그나마 상표라도 LG인 게 다행이었다. 처음 그 크기와 생김에 혹시 골드스타이면 어쩌나 걱정했으니까. 물론 이어폰은 ‘별도구매’였다. 이어폰까지 사고 남은 육만 원은 안방 문 바로 앞에 놓아두었다. 직접 어머니에게 남은 돈을 건넬 수가 없었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크맨이 생긴 후로는 지하철을 타는 시간동안 도시의 Delight를 반복해 들었다.
구간 반복 기능이 없었으므로, 오래된 기계가 털털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일일이 되감기 버튼과 정지버튼과 재생버튼을 반복적으로 눌러야했다. 나만의 Delight와의 재회를 꿈꾸며, 오래 전에 출고된 중고 워크맨을 괴롭혔고, 4분 18초 분량의 마그네틱 테이프를 혹사시켰다. 그러나 워크맨보다 먼저 지쳐버린 테이프가 늘어져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질 때까지,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