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의 콜로라도 여행기
2년 반 동안, 혼자서 미국 내 다른 주로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할 만큼 바쁘게 지내왔다.
그러다 이번 메모리얼 데이를 계기로, 콜로라도로 2박 3일간의 짧은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보통 콜로라도라고 하면 주도인 덴버나 그 옆의 볼더를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나는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 포트콜린스(Fort Collins)에 가기로 했다.
얼바인 근처 존웨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약 두 시간 만에 콜로라도의 주도인 덴버에 도착한 뒤, 렌터카를 빌려 한 시간 정도를 더 달려서 목적지인 포트콜린스에 도착했다.
포트콜린스를 선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미국 내 몇 안 되는 수의대 중 하나가 있는 콜로라도 주립대학교를 직접 가보고 싶었고, 또 한 가지는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덴버 시내가 너무 붐비고 복잡할 것 같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포트콜린스는 내가 살고 있는 얼바인과 도시 크기는 비슷하지만, 인구는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을 가보니, 그 ‘절반’이라는 수치보다도 훨씬 더 한적하고 휑한 느낌이었다.
도시 전체가 아주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고, 그 속에서도 몇몇 자리를 잘 잡은 로컬 상점들은 지역 사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단단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카페, 중고서점, 브루어리, 식당 같은 작은 공간들이 각자의 개성을 지닌 채 활기차게 운영되고 있었고, 그 공간들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시와 지역에 대한 애정이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전해졌다. 도시 전체가 북적이지 않으면서도, 사람과 일상이 부지런히 흘러가는 정중동(靜中動)의 느낌이었다.
포트콜린스에 도착한 첫째 날에는 별다른 일정 없이 숙소로 일찍 들어와 여유롭게 휴식을 취했고,
둘째 날 아침 일찍부터 시내 중심부인 올드타운에 있는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본격적인 여행 일정을 시작했다.
일정의 첫머리로 방문한 콜로라도 주립대 포트콜린스 캠퍼스는, 메모리얼 데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이 잘 보이지 않았고, 날씨도 흐려서 그런지 학교가 잠을 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캠퍼스 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교내의 수목원 (Heritage Arboretum)이었는데, 이곳은 로키 산맥 지역에서 어떤 종류의 나무나 식물이 잘 자라는지를 연구하기 위한 장소이자, 그 식물들을 일반 대중에게도 개방하여 교육적·공공적인 목적으로 활용되는 공간이었다. 아침에 방문한 수목원에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부부나, 가족단위로 산책을 나온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약 6 에이커에 달하는 넓은 수목원을 전부 돌아보진 못했지만, 많은 식물들 틈에 수줍게 고개를 내민 들장미가 특별히 눈길을 사로잡았다.
캠퍼스를 돌아보고 나서, 로키 산 국립공원으로 향하기 위해 바로 다음 장소인 '에스테스 파크(Estes Park)'로 발걸음을 돌렸다. 포트콜린스에서 에스테스 파크까지 운전하는 내내, 눈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지형과 협곡,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들과 강줄기 풍경이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어주었는데, 운전 중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에스테스 파크는 로키 산 국립공원의 동쪽 관문에 자리한 작은 산악 마을로,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 역할을 하는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설악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주할 수 있는 속초 설악동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이곳 에스테스 파크에는 다양한 식당과 기념품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국립공원을 구경하기 전에 모인 사람들과 구경하고 온 사람들이 한데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방문자 센터 (Estes Park Visitor Center)에 들러 마음에 드는 기념품을 몇 가지 구입하였다.
마을 한 편에는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걸을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그 길을 따라 다양한 잡화점들과 식당들이 옹기종기 늘어져 있었다. 여러 잡화점들을 이곳저곳 구경하다가, 크리스마스 장식품만을 파는 독특한 가게로 자연스럽게 발길이 끌렸다.
여름 한가운데에서, 잡화점 내 마주한 크리스마스 풍경이 조금 낯설었지만, 그래서 더 신비롭고 오래 기억에 남았다. 가게 안을 둘러보는 내내, 눈길을 사로잡는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울려 퍼지는 캐럴 그리고 코끝에 맴도는 계피 향 덕분에 순간적으로 계절이 바뀐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저녁 늦게까지 이어질 국립공원 일정을 앞두고, 근처 식당에 들러 허기진 배를 든든히 채웠다. 점원이 내준 프렌치 프레스 방식의 커피 맛이 좋았다.
이제 다음 일정이자 마지막 일정인 로키 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로키 산 국립공원은 워낙 규모가 커서, 연간 입장권을 끊어 여러 번 방문하거나 주간권을 이용해 여유 있게 둘러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여의치 않아 하루짜리 입장권을 구매했고, 동쪽 코스에서 가장 유명한 베어 호수(Bear Lake)와 그 주변의 트레일 코스를 중심으로 짧은 일정을 계획했다.
로키 산 국립공원에 들어서서 가고 싶은 장소를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내내 해발 3천 미터 고도에서 바라보는 콜로라도의 광활한 초원과 다양한 식생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풍경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몇몇 여행객들은 도중에 차를 잠시 세우고 본인의 차량 위에 올라서서, 장엄한 로키 산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고도를 따라 펼쳐지는 풍경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눈길을 끌었던 건 고산 지대에 서식하는 엘크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사슴과 동물)들이었다. 차량을 타고 가던 중 갑자기 앞선 차량들이 멈춰 서기 시작하면, 십중팔구 그 근처 어딘가에 엘크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신호다. 엘크가 눈앞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면, 여행객들은 차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창을 내린 뒤, 말없이 카메라를 들어 그 순간을 기록했다. 도로 옆 풀밭이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엘크의 모습은, 이 국립공원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면 중 하나였다.
첫 목적지는 히든 밸리(Hidden Valley)였다. 이름 그대로, 로키 산맥의 울창한 숲 사이에 조용히 숨겨진 작은 골짜기 같은 공간이었다. 1992년까지 스키장이 운영되던 곳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로키 산의 독특한 풍광(風光)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독특한 산책 코스로 변모해 있었다.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과거 스키 슬로프로 사용되었을 법한 경사면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내가 방문한 날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흐린 날씨였는데, 오히려 그런 날씨 덕분에 더욱 운치 있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스프래그 호수(Sprague Lake).
이곳은 과거에 '애브너 스프래그(Abner Sprague)'라는 초기 정착민이 이 지역에 들어와 목장을 운영하고, 낚시터와 관광지를 조성하면서 이름 붙여진 호수였다. 주변에는 그가 머물렀던 흔적을 따라 짧은 트레일이 조성되어 있었고, 평평하게 펼쳐진 호수 주변 풍경은 조용한 정취를 더했다.
특히 이 호수는 고요한 수면과 낮게 깔린 능선들이 어우러져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호수 주변을 걷는 내내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에 나오는 회화의 한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베어 호수(Bear Lake). 이곳은 로키 산 국립공원 동쪽 코스에서 가장 잘 알려진 명소 중 하나로, 빙하의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해발 고지대의 호수다.
호수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맥과, 그 사이를 메운 침엽수림이 어우러져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었다. 산책로 곳곳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로퍼를 신은 나는 미끄러운 길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 사이마다 마주하게 되는 호수의 풍경은 모든 불편함을 잊게 만들 만큼 황홀하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면, 다른 계절, 다른 날씨 속에서 또 다른 모습의 베어호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았지만 알찼던 2박 3일의 콜로라도 여행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덕에, 창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그랜드캐년을 볼 수 있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그랜드 캐년의 풍경은 어딘가 낯설면서도 압도적인 느낌을 주었다.
삶이 바빠지고 여유가 사라질수록, 그 바쁨은 점점 더 큰 관성처럼 나를 밀어붙이는 것 같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주변을 돌아볼 틈도, 나 자신을 돌볼 여유도 점점 사라진다. 속도가 붙은 차를 멈추려면 큰 힘이 필요한 것처럼 삶도 잠시 멈추려면 미리 (숨 쉴 틈과 같은) 여유를 만들어두는 게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멈춰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오히려 그 결심조차 더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짧지만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숨을 고를 수 있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도 얻을 수 있었다. 다음에도 이런 여행이 기분 좋은 만남처럼 자연스럽게 내 삶에 스며들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멈춰야 할 순간이 온다면, 그땐 지금보다 더 편안하게 그리고 더 용기 있게 멈출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