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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이작가 Jul 30. 2020

뉴타운 "I Have a Dream"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차별에 저항하자.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흑인 남성이 죽었다. 그의 이름은 조지 플로이드(Georgy Floyd), 당시 46세이고 경찰의 무릎 밑에 8분 동안 목이 졸린 채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고 그의 죽음은 흑인 차별에 대한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 Matters, BLK) 시위가 COVID-19에서 대규모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도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호주 시드니도 예외가 아니다. 호주에서도 1991년 이후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원주민의 숫자가 407명에 달하고, 단 한 명의 경찰도 죽음과 관련하여 책임을 진 경우가 없었기에, 호주 시드니의 BLK 시위는 차별을 받고 있는 원주민, 소수 이민자, 성소수자들이 함께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고 평등한 인권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호주는 1770년 캡틴 쿡이 발견하여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한 후 1788년 영국의 죄수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원주민, 애보리진(Aborigin)들이 살던 땅이었다. 영국의 죄수들이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언와와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들을 성공적으로 완성해 나갔다. 그리하여 1850년경에는 금광을 발견하여 많은 유럽의 이민자들을 넘어와서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키게 된다. 


연방(Federation)이 만들어진 1901년 백호주의(White Australian Law)라는 법을 만들어 아시아인의 이민을 제한하고, 원주민은 선거에도 참여할 수 없는 합법적으로 차별하는 법이 1973년 폐지될 때까지 존재했다. 영국, 유럽 사람들 역시도 200년 전에 온 이민자인데, 조금 일찍 왔다는 이유로 다른 인종을 차별했으며 , 원래의 주인이었던 원주민까지 핍박하는 법인 것이다. 




오늘의 벽화(Mural)는 시드니의 신촌, 시드니대학이 있는 뉴타운(Newtown)의 'I Have a Dream'이다. 이벽화 벌써 30년 전 1991년 줄리 프리너(Juilee Pryor)가 그렸고 2014년에는 문화유산(Heritage)으로 지정이 되어 뉴타운의 상징되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e Luther King Jr.)와 'I have a dream' 지구와 원주민의 깃발이 큰 벽면을 채우고 있다. 노란색 원은 이글거리는 태양, 빨간색은 생명의 근원인 흙 그리고 검은색은 원주민 자신의 피부색을 상징한다. 특히 다른 곳이 아닌 시드니의 뉴타운에 있기 때문에 그 벽화가 더욱 빛이 난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인권운동가이자 1964년 노벨 평화상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No Blacks and Dogs'라는 문구가 공공장소에 버젓이 걸려있던 1955년 미국 몽고메리시에서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가 된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흑인 차별 반대하는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하고, 1863년 노예해방 선언을 하였던 링컨의 기념관 연단 앞에서 명연설을 하게 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부모의 후손과 

그 노예의 주인이 낳은 후손이 


식탁에 함께 둘러않자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언젠간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삭막한 사막으로 뒤덮인 채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미시시피 주조차도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는 오아시스로 탈바꿈되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자식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차별을 받는 존재가 흑인이었고, 호주에서 차별을 받는 존재는 원주민들과 타국에서 온 이민자들과 그리고 게이, 레즈비언 같은 성소수자들이다. 


차별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부모, 국가, 성별, 종교 등의 이유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것이다. 돈 많은 부모나 가난한 부모를 내가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듯이 흑인, 아시아, 백인도 선택을 할 수 없으므로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주류에 속해 있다면 편안함과 익숙함에 빠져서 비주류, 소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된다. 자신의 불편함이 아닌 이상 남의 불편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어렵다. 그래서 항상 의식을 하고 깨어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차별의 폭력을 띄게 되고 무관심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로 소수를 차별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 영어를 가르치러 온 앵글로 색슨족의 외국인과 네팔, 인도네시아, 베트남의 아시아에서 온 외국인을 구분해서 말이다. 어떠한가? 우리가 누구보다 낫다며 누굴 차별한다면 호주에서 백인들에게 차별받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것이다. 


얼마 전에 개신교 목사님이랑 대화를 하면서 "교회가 너무 폭력적인 것 같아서 교회 다니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전도라는 명목으로 무슬림 국가, 불교의 나라로 선교활동은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또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성소수자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 과연 형제를 사랑을 하라고 가르친 하나님의 제자들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무지개의 일곱 색깔 중에 빨강이 파랑보다 아름답다고 빨강이 파랑을 차별하고 온 세상으로 빨강으로 물들인다면 정말 아름다울까? 아니다. 모든 색은 자신의 색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다. 선호하는 색이 있을 수는 있지만 우월을 메길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도 뉴타운(Newtown)에는 원주민 깃발과 무지개 깃발이 힘차게 펄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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