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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이작가 Aug 09. 2020

본다이 비치의 ANZAC Memorial

결코 잊지 말자. 그리고 전쟁에서는 아무도 승자가 아니다. 

"1915년 4월 25일 ANZAC Lest We Forget


900만 명의 군인과 1,900만 명의 민간인의 목숨을 빼앗아 갔던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제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 중에서도 최악의 전투로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갈리폴리(Gallipoli) 전투이다.


당시 영연방 국가의 일원으로 영국군에 편입이 된 호주, 뉴질랜드 부대는 Australia New Zealnad Army Corp. 앞글자를 따서 안작(ANZAC)이라 불렸다. 당연히 호주, 뉴질랜드는 상비군도 없었고, 양을 키우던 목동과 용기가 충만하던 젊은이들이 자원하여 간단한 군사훈련만 받고 90% 이상이 일병으로 참전하게 된다.


1915년 4월 25일 좁은 갈리폴리 해변에서 적군 오스만의 고지 탈환을 위해 용감한 안작(ANZAC) 부대가 투입되었다. 오후 4시 30분 작전대로 Digger라는 별명답게 고지전에 강한 호주 육군이 돌격하였다. 하지만 엄호사격을 하기로 한 해군의 시계는 3분이 느렸고 고지에서 오스만의 기관총은 8,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스만 군의 입장에서도 갈리폴리를 사수하지 않으면 수도 이스탄불까지 위험한 상황이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총탄과 식량의 보급도 힘든 상황에서 칼과 돌로 양편이 뒤엉켜서 처참하게 싸우게 된다. 6개월 동안 총상뿐만 아니라 탈수, 전염병으로 연합군 25만 명, 동맹군 25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결국 연합군의 후퇴로 오스만이 승리하였다.  


당시 호주의 전체 인구가 5백만 명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40만 명이 전쟁터로 갔는데 이 숫자는 18세에서 44세 남자의 46%에 달하며 6만 명이 전사를 하고 15만 명이 다쳤다. 이 갈리폴리 전투에서만 8,587명의 호주군이 전사하였다. 쉽게 말해서 두세 집에 한 명은 전쟁에 나갔고, 열 집에 한 명은 전사가가 생긴 것이다.

  



시드니의 본다이(Bondi) 비치는 2km 정도로 넓은 모래 해변에 바다수영, 서핑을 하기 최고이다. 북쪽의 North Bondi Surf Life Saving Club부터 남쪽의 Iceberg 그리고 Hall Street 에는 식당, 카페, 바도 많고 일 년 내내 축제와 파티가 끊이지 않는 여행자들의 천국 같은 곳이다.


특히나 안전 요전(life Saving Guard) 본부가 있는 Bondi Pavillion에서 비치로 내려가는 계단 양옆의 난간 벽은 본다이 그라티피 벽(Bondi Graffiti Wall)라고 시드니의 유명한 아티스트들에 의해서 매년 새로운 그라피티가 그려진다.


2003년에 Droogie, 본명 Steve 가 그린 안작 벽화 (ANZAC Mural) 은 관할 지역구인 Waverley Council에서 영구히 보전하기로 결정하여 항상 볼 수 있는 벽화이다. Steve는 2002년 88명의 호주인 포함하여 200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발리 테러를 추모하고, 본다이에 살던 15세 소녀 Cloe Byron를 기억하는 프렌지파니 꽃의 소녀 (Bali Memorial – Frangipani Girl)도 그린 작가이다. 


벽화의 중앙에는 전쟁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부축하는 우울한 병사 얼굴이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위치한다. 시드니항에서 출발할 때는 살아서 다시 시드니의 맥주를 마시자며 다짐하던 전우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으니 당연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할 참담하고 또 살아남은 고통,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것이다.


왼쪽 소형 대포를 어깨에 짊어지고 소총을 들고 있던 젊은이가 지금은 오른쪽처럼 가슴엔 훈장과 얼굴엔 주름을 달 백발의 베테랑이 되었을 것이다. 그사이에 시드니타워, 오페라하우스가 만들어지고 많이 세월이 변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우의 시체를 유럽에 묻고 돌아올 때 황량한던 유럽의 평원에 빨간색 양귀비(Poppy) 많이 피었다. 마치 전우들의 피가 물든 것처럼 말이다. 



      

Lest We Forget 은 '어찌 우리가 잊으리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100년이 지난 지금도 4월 25일, 안작데이(Anzac Day)가 되면 호주, 뉴질랜드, 영국, 터키 유가족들이 추모하기 위해 터키 갈리폴리로 간다. 


시드니에서도 매년 4월 25일 새벽 6시 미명을 밝히는 트럼펫 소리로 시작을 하여 거리에는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이 퍼레이드를 하며, 동네 입구의 ANZAC 기념비에 그 동네 참전용사들의 이름이 기록하고, 캔버라의 전쟁기념관(War Memorial) 에는 모든 전사자들의 이름과 항상 꺼지지 않는 횃불로 항상 기억하고 있다.


오스만의 승리를 이끌었던 백전백패의 케말 파사는 터키의 아버지, 아타 튀르크, 로 영웅이 되었지만 다 죽음 앞에서는 부질없는 일이다. 또 1차 세계대전에는 호주, 터키가 총을 겨누었지만 40년 후 한국전쟁(1950/6/25~1953/7/27)에서 한편이 되어서 중공군을 막아내었으니 참 전쟁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터키 갈리폴리에는 케말파사의 글이 있다.  


"이제 우리는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다.

여기에서 전사한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의 아들이다


이제 모든 터키의 어머니들이

자식처럼 품을 테니 이제 화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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