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창의적인 인물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과학, 발명, 해부학, 축성술 등 다재다능한 재능을 보인 만능의 천재이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은 유다가 은화 30냥에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기기 전, 계시를 받은 예수가 “제자 중 누군가가 나를 배신하리라”라고 말하자 예수의 열두 제자는 마치 “그게 도대체 누구입니까! 스승님 알려주세요!!” 라고 외치며 만찬 장소가 한바탕 난리가 나기 직전의 순간을 그림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자료를 조사하던 중 재미난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다빈치가 예수의 관자놀이 부근에 못을 박아 넣고 이 못을 기준점으로 투시도를 작성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최후의 만찬 속 공간을 설계할 당시 내부형상을 폭은 좁고 길이는 길게 하여, 만찬이 열리는 방을 입체적으로 본다면 식탁과 예수 뒤편의 창문이 거리가 상당히 멀게 하였고. 이는 창문의 크기를 작게 하여 중앙의 인물이 더욱더 집중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나는 이 방식이 마치 영화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실제 영화나 뮤직비디오를 제작할 때 주인공들은 전부 화면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것이 생각났고, 중세기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던 기독교 사회를 벗어난 르네상스 시대였음을 고려 하더라도 시기상 그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공간을 정말 잘 활용하는 천재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들 역시 최후의 만찬을 그렸는데 여기에서 다빈치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유다는 스승을 은화 몇 닢에 팔아넘기고 자살한 ’배신의 상징‘인 인물이다. 이는 다른 화가의 최후의 만찬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다른 작품에서는 배신자 유다가 마치 자신의 죄를 변명하거나, 죄를 들켜 예수와 제자들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공간적으로 식탁의 반대편에 있어 누가 유다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나는 유다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유다가 열두 제자들 사이에 교묘하게 섞여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마치 추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아직 배신자가 밝혀지기 전의 시간적 상황이기 때문에 누가 배신자인지 모르게 하여 누구든지 배신자가 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다빈치는 인물의 표정과 손짓을 통하여 각 인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다빈치 특유의 만능 천재성이 예술작품을 만들 때조차 빛을 발한다. 다빈치는 손을 아주 유용하게 이용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손가락을 하늘로 치솟게 하여 마치 맹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인물이 믿음을 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모나리자의 공손한 손, 손바닥을 상대에게 보이는 동작 등, 다빈치는 손동작을 이용하여 작품에 굉장한 동적인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는 ’최후의 만찬’에서도 역시 이용되었다. 또한 다빈치는 인물 각각에 인간의 모든 군상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열두 제자들은 인간의 감정을 상징하며 인간의 자화상이 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그는 최후의 만찬 속에 잘 녹여내었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전 많은 양의 스케치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스케치에서는 아래의 사진과 같은 인물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는 골상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골상학은 우리나라의 관상과 비슷한 개념으로 얼굴의 비례로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학문이다. 다빈치는 아마 골상학적 요소를 통하여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려고 하였던 것 같다. 해부학에 관심이 많던 다빈치의 성향이 그림에 투영된 것으로 생각한다.
다빈치는 아마 사람들의 얼굴들을 그리며 사진속의 남자와 같은 사람이 골상학적으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턱이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파였으며 얼굴이 홀쭉한 사람을 최후의 만찬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바로 배신자 ‘유다’ 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단서 또한 유다의 손에서 찾을 수 있다. ‘스승을 은화 몇 닢에 팔아넘긴 자‘ 유다는 그 은화 주머니를 손에 쥐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다빈치는 그림 속 빛을 통해 유다가 쥐고 있는 은화 주머니를 다른 음식이나 보자기 등과 잘 구별이 되지 않게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유다의 손을 주목하지 않게 하였다.
예수는 배신자를 직접 말하지 않고 ”내가 빵을 건네는 자가 바로 배신자이다.“ 라고 하였는데 유다의 왼손을 보면 예수가 집으려는 빵을 같이 집으려고 하는 것을 통하여 범인임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전체적인 작품을 보다보면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유다의 얼굴만이 절반도 드러나 있지 않다. 유다의 손 또한 어떠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러한 요소들은 유다가 최후의 만찬이라는 작품 속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
될 수 있게 하였고. 그 결과 나는 잘 만들어진 반전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최후의 만찬을 감상한 후, 이 작품을 조사하던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해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 날 다빈치는 손님에게 스파게티라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고 한다. 하지만 손님들은 스파게티라는 새로운 음식을 먹기 어려워했다. 그 당시에도 포크가 있었지만 고기를 집는 촉이 두 개뿐인 포크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빈치는 문제점을 생각하였고, 자신이 만든 맛있는 스파게티를 사람들에게 먹이고 싶어 현재의 삼지창 모양 포크를 개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다빈치가 자신의 발명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포크를 개발한 것처럼, 그가 살아가면서 연구하고 느낀 ’인간’이라는 것을 자신만의 다양한 회화적 기법과 학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