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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는 어째서 히로코에게 프러포즈를 하지 못했나

러브레터(1995)

by 셔레이드 걸

러브레터를 그렇게 수없이 돌려 보고 일본어 대사를 외우고 99년 국내최초개봉 당시에도 극장에 달려가 관람을 했을 정도의 마니아라고 자부하는데 오늘에서야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히로코를 처음 만난 날 사귀자고 할 정도로 박력 넘치는 상남자였던 후지이가 도대체 왜, 결혼하자는 말을 두 시간이나 하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야경만 바라본 이유는 무얼까 하고.


아래는 의심스러운 포인트 셋.
(※ 편의상 여자 이츠키는 이츠키, 남자 이츠키는 후지이로 호칭)


이츠키가 졸업한 중학교를 찾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마구치 선생님께 후지이의 사망을 전해 듣자 카메라 무빙은 마치 학교 안의 누군가가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가 이내 창을 통해 이츠키의 뒷모습을 몰래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히로코는 불아범의 산장에서 조난 사고를 겪은 일행들이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를 부르게 된 사연을 듣고 표정이 굳더니 그제야 자신이 후지이에게 프러포즈를 받지 못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왜 하필 그 타이밍이었을까.


도서부 후배들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을 들고 이츠키의 집을 찾았을 때,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온다.
거의 컷을 외쳐야 될 수준으로 이츠키의 머리가 마구 휘날리는데 멈추지 않은 것은 의도된 연출일까?

사실 후지이는 숙맥이라기보다는 굉장히 집요하고 치밀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소개팅을 주선한 소녀 이츠키에게 귀여운(?) 응징을 선사하고 교통사고로 인한 복합골절 때문에 고대하던 육상 경기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멋대로 레이스를 뛴 고집쟁이이다.


다리가 부러졌어도 달리는 것을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 3년간 짝사랑한 소녀를 과연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까?

소녀 이츠키가 날이 저물 때까지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이 내심 기뻐서, 영어 27점을 맞을 정도로 공부를 놓은 녀석이 그렇게나 꼼꼼히 오답체크를 하면서까지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붙들고 있었는데도?


그런 후지이가 성인이 되어서 초면인 히로코에게 대뜸 첫눈에 반했다며 고백하고 그날로 연인이 된다.

그 자리는 아키바가 절친한 후지이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후배라며 히로코를 소개하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후지이는 평소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으니 안심하고 불러냈을 텐데...

어쩌면 후지이는 아키바가 히로코를 마음에 둔 것을 눈치챘을 테고 선수를 친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이는 히로코를 불러내 반지 케이스까지 쥐고 두 시간가량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저 무뚝뚝한 사람이 결혼하자는 말을 못 하는구나... 그래 그럼 나라도 해야지...

단단히 오해한 히로코의 결혼해 주세요.라는 말에 좋아.라고 대꾸하는 후지이.


그런데 그는 왜 결혼을 앞두고 험한 겨울산에 올랐을까.

왜 혼자서만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을까.

어째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대신 '푸른 산호초'를 흥얼거렸을까.


이런 여러 정황을 종합했을 때 소년 후지이는 도서카드를 러브레터 삼아 소녀 이츠키의 이름을 쓰고 또 쓰며 (발견된 것만 88개) 일종의 프러포즈를 한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전학으로 인해 더 이상 러브레터를 쓸 수 없게 되자 마지막으로 건넨 도서카드에는 특별히 자신이 잘하는 것을 새기며 좀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표현을 했다.
바로 뒷면에 소녀 이츠키의 얼굴을 그려넣은 것이다.
(창가에 서서 늘 그녀를 바라보던 각도!)
다시 말해 초상화는 후지이가 방학 내내 공들여 준비한 반지이고 책은 반지 케이스인 셈.


그런 엄청난 의미가 담긴 책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이전(피하거나 퉁명스럽게 대하거나)과 달리 하얀 눈처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배웅하는 소녀 이츠키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얼마나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을지!!!

미완으로 끝나버린 그 수줍고 애틋한 고백은 기적적으로 첫사랑과 꼭 닮은 여자를 만나 두 번째 기회를 얻었음에도 끝내 실패로 종결된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그녀가 아니었으므로.
(히로코와 이츠키의 성격은 전혀 딴판이다. 예를 들면 NF vs ST...)


상상의 날개를 펴고 후지이의 관점에서 사후를 상상해 본다.


절벽으로 떨어지던 그가 유언 혹은 주문처럼 제일 좋아하던 가수,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를 읊조린다.

아~ 내 사랑은 남풍을 타고 달려가요...

어쩌면 그의 영혼은 오타루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초상화가 숨겨진 그곳, 두 사람의 추억이 가득한 학교 도서실로.

히로코와 편지를 주고받던 이츠키가 드디어 학교로 찾아왔지만 안타깝게도 책에 속박된 그는 그녀를 쫓을 수 없다.


그러나 시들했던 후지이 이츠키 도서카드 찾기 게임은 당사자 본인의 등판으로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되었고

마침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의 비밀이 도서부 소녀들에 의해 드러난다.

이제 이츠키에게 전달되는 일만 남았다.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온통 헝클어버린다.


이제야 내 마음을,
이제서야 네 마음도 눈치챈 거야?
바ㅡ보.


울먹이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준다.

자, 그래서 따뜻한 남풍이 된 후지이는 성불하느냐고?

아니 그럴 리가-
후지이가의 정원에는 두 사람과 같은 이름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는 그 나뭇가지 사이를 자유롭게 누비며 언제까지고 그녀의 곁을 지킬 생각이다.


- 결론 : 후지이는 사망 후 남풍을 타고 오타루에 도착했지만 집이 국도가 되는 바람에 모교인 중학교 도서관의 지박령(?)이 되었다가 첫사랑인 이츠키를 재회하여 결국 프러포즈를 완성한다. 끗.


+ 덧붙임
히로코가 앨범의 주소를 옮겨 적기 위해 펜을 찾을 때 괘종시계 소리가 뎅뎅- 울린다.

그것은 어쩌면 3주기 기일을 맞아 히로코에게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첫사랑)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후지이의 목소리 아니었을까.

그리고 밤에 묘소를 찾아온 아키바의 소원-히로코와의 결혼을 허락-을 들어주는 것으로 답례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출처 : 워터홀컴퍼니 (https://www.instagram.com/waterhole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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