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끝은 자멸일지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알고 있는가.
당연히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니다.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
이 명작의 라인업 중에 개인적으로 맥베스를 가장 좋아하고 오셀로에는 무관심하다.
왜일까 생각했는데 그는 의심하고 질투하고 이간질에 속아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제 손으로 죽여버린 얼간이라서였다.
당최 의심이란 무엇이길래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인가.
지금도 진행되는 프로젝트인지는 모르겠지만 2013년도에 <콘텐츠 창의인재 동반사업 ‘창의교육생’ 모집 공고>라는 것을 보고 지원했다가 2차 면접에서 미끄러진 적이 있다.
CJ에서 진행하는 오펜 공모전과 비슷한데 기성작가, 감독 등 전문가를 멘토로 붙여주고 집체교육을 진행하며 소정의 월급여를 지원하는 일종의 신인작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었다.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만화, 뮤지컬 등등 다양한 분야별 전문 플랫폼 기관이 리스트업 되어 있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TV드라마가 적힌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 신청서와 단막극 습작 대본을 넣었다.
1차 서류통과가 되었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여의도에 있는 면접장으로 향했다.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고 수험번호대로 3명씩 들어가 면접을 보았는데...
아, 그 느낌 다들 알 거다. 나는 틀렸네- 싶은 기분.
촉이 좋은 편이기도 하지만 현장의 누가 봐도 알았을 거다.
면접관들은 그저 예의상의 질문을 할 뿐이고 내 대본에도, 나라는 인간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최악의 면접을 마치고 반대편, 서울 동쪽 끝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우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마저 탈락이면 꼼짝없이 어떻게든 직장을 구해야만 할 정도로 쪼들리던 차였으니까.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나와 함께 면접장에 들어간 2명은 당연히 합격자 리스트에 있었고 내 번호만 쏙 빠져있었다.
그래... 뭐 처음부터 크게 기대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기술도 능력도 없던 30대 중반의 나는 간신히 서울 외곽에 위치한 대학교의 행정조교일을 얻을 수 있었는데 전임자는 놀랍게도 그 프로그램에 합격해서 급하게 일을 그만두게 된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
플랫폼은 달랐지만 어쨌든 사직서를 낸 그녀 덕분에 오갈 데 없는 내가 운 좋게 직장을 구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나에게 글쓰기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에만 집착하는 의심꾼이 되어버렸고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밤새워 글을 쓰면서도 즐거워하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나 많은데 내 손은 왜 이리 느리냐며 투덜거리던 작가지망생은 영원히 소멸해 버렸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차라리 그 공고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결국 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을 터다.
계속 쓰는 것이 정답이었으나, 나는 숙제를 미루는 아이처럼 그것을 외면한 채 불안에 떨며 무려 12년을 낭비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장롱 아래 깊숙이 처박아둔 노트를 꺼내 펴고, 연필을 쥐고, 천천히 서툰 글씨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