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에 조깅을 시작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다사다난했던 연말을 보낸 뒤 처음엔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그다음엔 날씨가 추워서,
현재는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지긴 한다.
오전 8시면 으레 거실의 커튼을 걷고 아침해가 베란다로 야금야금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슬금슬금 침실로 향할 뿐이다.
예전이라면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환승할 시간이었다.
(출근 시간 AM. 8:30 경기도민이었으므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감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이런 게으름뱅이가 어떻게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고 7시에는 버스에 올랐는지...
흡사 전생의 기억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도대체 회사는 어떻게 다닌 걸까?
알람이 서너 개쯤 울리고 난 뒤에야 간신히 잠에서 깨면 우선 화장실에 들렀다가 무언가를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입맛 없는 아침이라도 약간의 과일과 잼을 바른 빵, 주스 정도는 들어간다.
이렇게 먹고 조깅을 하려고 했었는데...
혼잣말로 변명을 해도 들어줄 사람은 없다.
습관처럼 TV를 틀어 NHK까지 채널을 돌려보지만 체념하듯 뉴스에 멈추고 만다.
아침을 먹으며 정치뉴스를 보는 어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입이 짧아 식빵 한 조각 또는 롤빵 두 조각이면 충분하지만 라즈베리딸기잼에 시나몬애플잼, 땅콩버터까지 욕심내어 모조리 꺼내온다.
곧 허기질 것을 생각해 손바닥만 한 바나나 하나를 꾸역꾸역 씹어 삼킨다.
식사를 마친 뒤 대충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늘 입는 트레이닝 바지를 꿰어 입고 대학 캐릭터가 프린트된 티셔츠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한낮엔 날이 제법 더워져서 트레이닝 재킷 정도만 걸친다.
폭염과 장마로 고통받는 여름은 대체로 거지 같지만 옷을 가볍게 입을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맘에 든다.
그렇다고 여름 날씨가 거지 같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늑장을 부리다가 부랴부랴 차키를 들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파란색 경차에 시동을 걸고 아버지의 집으로 향한다.
직선코스로 2.7km의 짧은 거리지만 대로변에 초등학교, 중학교가 줄지어 있어서 거의 모든 도로가 스쿨존이다.
부주의하게 딱지를 뗀 적도 있고 답답함에 몇 번인가 길을 돌아서 간 적도 있지만 결국은 티맵을 켜놓고 최단거리의 페널티를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느릿느릿 달려도 10분 남짓이면 집에 도착한다.
겨우 약속시간에 맞춘 나와 달리 식사와 양치는 물론 외출복으로 환복까지 마친 ISTJ 아버지가 게으른 딸을 기다리며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계신다.
이제는 지팡이로도 제법 잘 걸으시는 아버지를 뒤에서 감시하며 엉성한 보행 자세에 대해 품평한다.
그러나 신뢰도 110%의 재활담당 선생님이 가르쳐준 방식이라며 곧 반박당한다.
티격태격하며 아파트 입구까지 걸어가 택시를 호출한다.
대부분의 기사님은 다리가 불편한 노인이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친절해지곤 한다.
타는 데도 내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대체로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고 천천히 하시라는 상냥한 말도 건넨다.
혼자 택시를 탈 때에는 거의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병원에 들어서면 1층 로비 구석에 카페가 하나 보인다.
무명의 프랜차이즈 같은데 전혀 기억이 안 난다.
본다 해도 곧 잊어버릴 이름일 거 같지만.
아무튼 평범한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한잔이 무려 5천 원이나 하지만(참고로 별다방 아이스 카페라떼의 가격이 5,200원이다) 인근의 알만한 프랜차이즈 카페가 롯데리아뿐인 시골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주에 한번이니까- 라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플라스틱컵에 담긴 아바라를 쪽쪽 빨며 아버지를 에스코트해 물리치료실로 향한다.
대기실에 앉아 가방을 뒤져 집에서 싸 온 팩주스를 아버지에게 건넨다.
왕복택시비에 진료비에 매번 무직자 딸이 부담하는 게 미안했던 아버지는 당신이 마실 음료는 집에서 갖고 오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물론 그것도 내가 쿠팡에서 주문한 것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재활훈련과 물리치료에는 보통 40분 내외가 소요된다.
나는 그동안 재빨리 수납과 차주 예약을 마친 뒤 방문객 대기실에 앉아 챗지피티와 수다를 떨며 폰삼매경에 빠진다.
무료버전이라 자주 제한이 걸리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해당 공간은 중환자실 방문객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대기실인데 내가 말을 걸고 싶게 생긴 호구형 얼굴인지 종종 대화요청이 들어온다.
- 아버지 지팡이 어디서 샀어요? 그렇게 넓게 네 발 달린 거는 잘 없는데?
- 아버지 치매검사 왜 받아요? 멀쩡해 보이시는데? 아, 정기검사- 그런 건 어디서 받아요?
- 아버지 다리를 다치셨나 봐요? 부러지셨다구? 어떻게? 아아 교통사고- 아버지 연세가 몇인데 운전하세요?
언젠가 아버지 사주를 봤더니 도화와 홍염이 사방에 깔려있더만 역시... 인기인의 숙명인가.
너무 쌀쌀맞지 않은 느낌으로 적당히 단답형 대꾸를 한다.
보통은 환자가족 내지는 환자본인인데 죄다 어르신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어도 병원은 있다.
평일 오후시간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모든 치료가 끝나면 아버지에게 화장실 방문 의사를 체크한 뒤 귀가를 서두른다.
다시 택시를 부르고 또다른 친절 기사님을 만난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 달라는 요청에도 싫은 내색은 전혀 없다.
내릴 때면 아버지에게 쾌차하시라는 인사도 건넨다.
아버지에게 환복을 하고 얼굴과 손발을 깨끗이 씻도록 지시한 뒤 나는 밥솥과 냉장고를 뒤져본다.
급히 주문한 6인용 밥솥은 정확히 이틀이면 텅 빈다.
부랴부랴 쌀을 씻어 안치고 국은 한솥 끓여서 김을 식힌 뒤 전자레인지용 국그릇에 한 끼 분량으로 소분해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는다.
8개짜리 세트를 샀는데 역시 잘 산 거 같다고 중얼거린다.
쿠팡이 없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몹시 불편했겠지만 그만큼 돈을 안 써서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많으면 서너 시간을, 적으면 한두 시간 정도를 꼬박 서서 좁은 집안을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거린다.
요리, 설거지, 청소, 빨래, 일반/재활용/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등등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그 밖에도 각종 식료품과 생필품의 재고수량 파악해서 발주하기, 아버지의 구매요청물품(상비약/기호식품 등) 접수 등의 업무를 빠르게 처리한다.
이렇게 한나절 가량의 수요일 고정루틴을 실행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야말로 녹초가 된다.
씻기 전 잠시 멍하니 앉아 어둑해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한다.
도대체 그동안 회사는 어떻게 다닌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