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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 a Fan Jul 09. 2024

어릴 적 너를

끄적끄적

깜깜하고 막막했던 터널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 사이에 아이가 큰 것은 확실하다. 짧은 단어를 반복하던 것에서 이제는 긴 문장, 그리고 말속에 다양한 감정까지 실어낼 수 있다. 언젠가 작게 속삭였던 나의 말도 잘 기억했다가 아주 적절한 상황에 툭하고 꺼내는 아이를 보며, 이래서 어른들이 애들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라고 하셨구나 여실히 느낀다. 그래도 이전보다 대화가 조금 더 원활해지면서 생긴 우리들의 티키타카로 웃을 일이 많아졌다.


아이의 변화와 무관하게 나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같은 일상이지만 그 일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 해본 것이 좋게 작용하고 있다. 특별한 것은 없다. 그냥 예전에는 '시간이 없어' 하면서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한 번 해보고, 저녁 시간 아이를 빨리 씻기고 재우기 바빴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 노래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춤추는 것도 즐기고, 집안을 싹 치우지 않으면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에서 '에라 모르겠다 내일 하자' 하면서 그냥 다 내려놓고 자버리는 것.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직장이 내 여유에 한 몫하는 것도 있다. 나는 일주일에 3일 일한다. 의무적인 요일 외에 일을 더 하고 싶다면 선택해서 더 할 수 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면 일하고 시간이 필요하면 일하지 않는다. 아이 엄마를 위한 직장 보스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스케줄을 갖게 된 것이 최근 일이라 아직은 좀 얼떨떨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내 시간'을 조금씩 가져보고 있다. 매주는 아니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혼자 브런치를 먹으러 가는 시간. 그 시간이 나에게 심신의 안정과 행복을 주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내가 되고 싶은 '엄마의 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친절한 엄마? 따뜻한 엄마? 밝은 엄마? 지혜로운 엄마? 사람이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한결같으면 참 좋겠지만 또 사람이기에 너무 변덕스럽지만 않다면 다채로워도 좋지 않을까? 라고 혼자 질의응답하면서 한결같지도 다채롭지도 않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만 매일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진짜로 고민하는 것은 아이가 바라보는 엄마로서의 내 이미지라기보다 아이의 ‘도덕성’을 결정짓는 훈육법을 잘 갖춰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나도 아이에게 저렇게 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되는 거울효과도 경험하고, 더불어 여러 조언과 육아 공부를 통해 나름의 가닥을 잡아가는 듯하면서도 가장 큰 변수는 그날따라 유난히도 말을 듣지 않는 아이의 땡깡과 그 순간 나의 컨디션이 나의 지도 방향을 좌우하게 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모본(模本)‘일 터인데, 백 번의 말보다 일상에 스며드는 내 인성이 아이를 키워낼 것인데, 일관되지 않은 감정 상태로 인해 때로는 작은 것에도 버럭 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면 결국 ’엄마의 자격'을 논하게 되고 좌절하게 되어 매번 어두운 터널 속에 스스로를 깊이, 더 깊이 가두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의 모습은 아직 어디에도 다다르고 있지 않지만, 이런 나의 고민들과 노력이 쌓여 시간이 지난 후 아이가 엄마를 떠올렸을 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다니는 문구 하나가 있다.


"아이들이 부모를 생각할 때 '너그럽다' 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리면 정말 좋겠습니다."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 오은영 저)



한 개인으로서의 욕심이 엄마로서의 역할보다 그 부피가 커질 때, 내 부족함이 내가 잘하고 있는 모든 것을 덮을 때, 나 스스로를 응원하기 위해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어린, 내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을 보는 것이다.


젖을 먹이며 바라보았던 아이의 모습, 작은 움직임에도 감동했던 그 순간, 너무 작고 소중하다 생각하며 나의 모든 집중을 쏟았던 그때를 떠올리며 그때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지금도, 앞으로도 할 수 있다고 나를 다독인다.


"지나고 나니 그렇게 못해준 게 너무 아쉬워" 하던 언니의 말이 또 누군가에게 건네는 나의 말이 되고 싶지 않다. 아쉽다는 것만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의 판단과 선택으로 놓쳐버린 것만큼, 정말 아쉬운 것은 없을 것이기에.


“나는 아이가 어릴 때 이건 많이 해준 것 같아. 그래서 만족해” 가 아닌 “그래서 다행이야”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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