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말했다.
“어, 아니 어제는 저녁을 같이 먹는데 갑자기 꼴도 보기가 싫은 거야. 그래서 헤어졌어.”
속사정이야 다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을 염두하며 만나고 있는 사람이었다. 문득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족을 다른 말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 식구(食口). 가족이 된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지만, 같이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 행복하고 편안한 것도 굉장히 중요해."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다시 곱씹어봐도 맞는 말이었다. 평생 한솥밥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 밥 먹는 모습이 꼴 보기 싫다면 뭐, 갈라서야지.
“그래 잘했어, 잘 헤어졌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누구(1)와 무엇(2)을 먹느냐에서 어느 것이 나에게 더 비중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매번 누구와 먹을지의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쉬는 날 기분 좋게 먹고 싶다면 정말 ‘편한’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나에게 ‘편한’ 사람을 정의하자면 이렇다.
1. 민낯에 슬리퍼 신고 만날 수 있는 사람
2. 많이 먹고 적게 먹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3. 주고받는 대화가 서로에게 유익하고 좋은 사람
한 때 혼자 밥을 먹지 못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 어려움은 기숙사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적부터 아침을 거르고 학교 가는 일은 많이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기숙사를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친구들 대부분이 밥보다 잠을 선택했고, 끝까지 침대에서 버티다가 등교 시간에 맞춰 부리나케 나가기 바빴다.
암묵적인 인식이었는지 모르지만 식당에 혼자 밥을 먹으러 가는 사람은 정말 친구가 없는 ’혼자‘인 사람들로 여겨졌다. 남학생들 중에서는 더러 혼자 먹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게 여학생일 경우, “쟤 왜 혼자 먹어?” 하며 모두가 수군거렸다. 그리고 나는 이 상황적인 압박을 이겨내고 ‘마이웨이’를 외치며 혼자 먹으러 갈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려운 형편에 그래도 삼시세끼 잘 챙겨 먹으라고 부모님이 밀리지 않고 내주시는 식비니 더 열심히 챙겨 먹고 싶었지만, 끼니를 먹을 수 있는 여부가 친구들에게 달려있는 참으로도 수동적인 시간이었다. 고3이 되어 기숙사 도방장이 되면서 식비를 면제받고 나서야 그나마 마음의 부담을 좀 덜어낼 수 있었다.
학창 시절동안 급식시간이 편안했던 적은 많이 없었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정말 ‘혼자’가 된 사건이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점심시간 종이 울렸고 다른 반에 있는 친구들이 나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이동이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사실 기다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느린 5분이 지났고, 모든 교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홀로 교실에 남겨졌다. 친구가 나를 의도적으로 두고 간 것이었다.
밥을 일찍 먹고 교실로 돌아온 반 친구가 물었다.
“어? 너 오늘 밥 안 먹으러 갔어?”
“아, 응 오늘 좀 공부할 게 있어서.”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혹시라도 더 가까이 다가와 무슨 일 있느냐고 물으면 바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이미 입시는 끝났고 대학도 붙었는데 공부는 무슨 공부. 친구는 내가 먼저 대학을 붙었다는 이유로 질투가 나서 그때 교실에 놓고 갔노라고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나에게 사과했다. 내가 버려졌다는 사실도 슬펐지만, 그 정도의 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에 더 슬펐다.
그 이후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혼자 먹을 일이 있다면 그냥 테이크 아웃을 해서 길을 걸으며 먹거나 집에 싸 와서 먹었다. 식당에 혼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나를 보며 “저 사람 친구가 없나 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점심시간만 되면 동료가 나를 두고 가지 않을까 매번 긴장해야 했다. 혼자 밥을 먹는 것, 별 것 아닐 수 있는 그 행위가 나에게는 두려움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 겪었던 그 사건을, 그 외에도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많은 일들을 마치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부정하고 기억에서 지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사건이 나에게 혼자 먹는 어려움을 준 원흉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그 장면 속 갇혀 있는 어린 나를 떠올리면, 가엽다.
그때는 다 어리니까, 그 나이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지 않은 행동이 무엇인지 충분히 다 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하고 조금 이기적일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내가 먼저 너그럽지 않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저지른 실수와 잘못 또한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를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혼자 좋아하는 식당을 찾아가 밥 먹는 시간이 나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무엇보다 세상 편한 차림으로, 양껏 먹으며,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평생친구'가 생기고, 행복한 밥상을 나눌 수 있는 식구(食口)가 생겼음에 감사하다. 내 아이도 자라면서 관계로 인한 여러 어려움을 겪겠지만, 가족 안에서 나눈 건강한 경험으로 몸과 마음이 단단하게 자라기를 기도한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너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 친구가 되어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