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왔다.
“친구야, 생일 축하해! 내가 좀 늦었지.“
어제가 내 생일이었나? 날짜를 확인하니 생일이 되려면 아직 3일이 남아있었다. 내 생일은 사실 몇 일이라고 고쳐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를 기억해 주고 늦게 축하해 주는 것은 아닐까 미안해하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몇 주전 직장 동료가 나에게 물어봤다.
“생일날에는 뭐 할 거야? “
나는 마치 중요한 일정이었는데 그걸 잊은 사람처럼 놀랐다. 한국 마트 할인 요일, 강아지 그루밍 날짜, 아이 치과 예약과 같은 일정들만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내 생일을 기다리고 설레어 한지 오래였다.
아니 나를 잊은 지 오래였다.
사실 기억한다고 해도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 같이 보내고 싶었다. 그래도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 정도? 케이크라면 평소 후식으로 아니면 커피와 함께 끼니로도 먹는 것이긴 하지만, 요즘 우리 집 하나의 전통처럼 누군가의 생일이 되면 사 오는 그 두리안 케이크! 그거면 충분할 것 같다. 매번 사러 가는 사람이 달라서 그런지 몰라도 갈 때마다 늘 같은 질문을 받는다.
“두리안이 무엇인지 아시죠? 드셔 보셨죠? 확실하죠?”
두리안이 어떤 과일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잘 알 것이다.
생일날 일정은 간단했다. 출근, 직장 동료들과 점심, 가족들과 저녁.
오랜만에 떨렸다. 긴장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평소 점심을 먹는 시간 대도 다르고, 다 각자 먹기 때문에 동료들과 처음으로 같이 먹는 것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떤 직장이고 어떤 팀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기 문화에서는 동료의 생일을 어떻게 축하해 주는지 궁금했다.
나에게 먹고 싶은 메뉴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아직 주위 지리나 음식점이 익숙하지 않아 괜찮은 곳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중 국숫집이 눈이 띄었지만, 가장 무난한 초밥집을 선택했다.
먹으러 가는 길에는 50년 전 중국에서 캐나다로 이민 온 동료의 가족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73년도에 다섯 자매를 비행기에 태우고 말 한마디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 건너온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지. 그저 ‘대단하시다’는 표현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처음 이 부서에 들어왔을 때 눈길도 한 번 주지 않아 곁에 갈 때마다 긴장되고 말을 걸기까지 꽤 걸렸던 동료였지만, 최근 대화의 물꼬가 트인 이후 엄마랑 이야기하는 것처럼 편하고 좋다. 한국인인 나에게 지금껏 숨겨왔던 BTS를 향한 열정적인 마음을 표현하시며 (BTS의 ‘Fire’라는 노래가 너무 좋으시단다) 매일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다.
각자 원하는 메뉴를 시켰다. 우리처럼 된장국에 다 같이 숟가락 휘젓는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 시킨 음식을 깔끔하게 먹고 끝낼 줄 알았지만, 자신의 음식이 나오자 나에게 한 입이라도 맛보지 않겠냐며 너도 나도 권해주었다. 밥 먹는 내내 내가 주인공이 되지 않고, 부담스러운 질문세례를 받지 않아 좋았다. 그냥 오랜만에 다 같이 먹는 기분 좋은 점심이었다.
먹은 후 또 계산은 어떻게 하는지 분위기를 보고 있는데, 계산서를 나에게 보여주지 않더니 우리 부서 전통이라며 생일자의 음식은 동료들끼리 나눠서 돈을 내준다고 말했다. 고마운 마음에 내가 후식을 사겠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동그레 졌다. 아 맞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지. 오지랖은 좀 넣어둬야지.
자연스럽게 그다음 생일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내리사랑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다음 생일자에게 진심 어린 애정과 아주 흔쾌히 점심값을 내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오늘은 저녁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날이니 내가 아이를 데리러 가기로 했다. 내가 가는 날에는 버스를 타고 집에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이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신나 있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비가 내려 신발과 옷이 다 젖고 우산 잡으랴 아이 잡으랴 불편했지만, 아이는 그 순간조차 하루 중 가장 신나는 순간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이었다. 집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퇴근해 돌아왔고, 우리는 예약한 시간에 맞춰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아이가 있으면 어디를 가든 진득하게 앉아 메뉴를 살피고 고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어제저녁 남편이 미리 봐둔 메뉴대로 순조롭게 주문을 했다. 애피타이저가 나오고 메인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아이의 인내심이 잠시 바닥났었지만, 메인이 나온 이후 우리와 마지막까지 그릇을 싹싹 비우고 다 같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디저트까지 마무리했다. 애피타이저와 메인의 맛은 정말 훌륭했지만, 솔직한 평가를 하자면 디저트는 평점 5점 중에 3.5 정도라고 해두고 싶다.
그렇게 원하는 대로, 평소보다는 조금 더 많이 먹은 정도의 또 다른 평범한 하루로, 생일을 보냈다.
교회에서 연이 닿게 된 페루 친구들이 주말 오후 근처 공원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날씨가 분명 좋을 예정이었지만, 당일이 되니 흐릿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자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냥 집에서 쉬는 게 좋지 않았나 생각하며 도착한 그곳에는 알록달록한 생일 상이 차려져 있었다. 큰 나무 아래 자리를 잡은 친구들 덕분에 우리 테이블은 비 한 방울 없이 뽀송했다. 나보다 더 들떠있는 친구들이 한국에서는 생일을 어떻게 보냈었냐고 물어봤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을 불러서 하는 ‘파티’는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시끌벅적한 생일 축하 노래를 듣게 되었다. 페루 사람들은 모두가 케이크를 나눠 먹기 전에 주인공이 먼저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먹어야 하는 그들만의 전통이 있는데, 그 이유는 먼저 먹으라는 배려가 아닌 얼굴에 케이크를 마구마구 뭉게 버리기 위함이다. 그래서 보통 친구 생일에는 뭉게 버리는 용 하나, 먹는 용 하나, 두 개를 구입한다. 나는 얼굴 전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나를 기꺼이 내어주었지만, 친구들은 내 입과 코까지 묻는 정도로 배려해 주었다.
각자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내가 그들에게 ‘존재’ 하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어느 때에든지 모든 관심이 나에게 집중되는 순간은 조금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 그리고 귀중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라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생일 축하를 받게 되었다.
그다음 누군가의 생일날에는 내가 그 사람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