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투 시월드
남편과 연애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자랑은 아니다. 중학교 때부터 알았던 친구지만 이름과 얼굴이 익숙한 정도 일 뿐,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사이였다. 연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롱디 커플이라 늘 서로가 애틋하고 귀했고, 2년 남짓 짧은 연애 후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한 마디로 잘 몰라서 싸우지 않았다.
부푼 기대를 가지고 캐나다에 시집 온 것은 아니었다. 이미 시작부터 남편에게 억 소리 나는 학자금 빚이 있다는 걸 알았고, 신혼 집도 어머님 아버님이 이사 가시면서 비우신 곳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우리 돈 아끼라고 쓰시던 ‘좋은’ 물건들을 두고 가셨다 하셨지만, 살림에 서툰 나에겐 그저 정리하고 싶은 짐이었다.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는, 유통기한이 10년도 넘은 식료품들도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신 ‘좋은’ 식재료는 아니겠지? 큰맘 먹고 우리에게 살림을 넘겨주신 것처럼 들렸는데 이사 가신 집은 새 가전으로 채우신 모습을 보며, 누구를 위한 물려줌이었나 하는 생각 들었다. 그 속은 내가 다 알 수 없으니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으려 했으나,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에게 알콩달콩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신혼생활은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집에 발을 들인 첫날부터 시동생과 함께였다. 몇 년 전 직장에서 팔을 다쳐 재활 중인 데다 바깥 활동이 전무한 스타일이라 일을 나가는 남편보다 더 자주 마주쳤다. 몇 달 후 공부를 시작해 다시 직장에 나갔지만, 이번엔 뭔가 자신과 맞지 않다며 사직하고 다시 칩거 중이다.
내 집이라지만 ‘나의‘ 집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두 형제가 살던 집에 내가 얹혀사는 기분이었다. 작은 것 하나 잘못하면 시댁 어른들 귀에 소식이 들어가는 생생 리포터와 함께 사는 기분이었다. 이 무거운 기분을 떨쳐버리고 에라이 모르겠다 하며 내 마음대로 행동할 배포는 또 없는 사람이라 매일 눈치 속에 살았다.
딱히 시동생이 잘못한 게 없는데도 그냥 존재 자체가 불편했다. 내가 먹을 밥도 잘 안 해 먹는데 남편에 시동생까지 먹일 밥을 매일 준비하는 것도 불편했고, 브라 없이 편한 옷 입고 돌아다니지 못하는 것도 불편했고, 자신이 다친 경험이 마치 하나의 영웅담이 되어 누구도 자신보다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자랑(?)하는 것도 불편했고, 혼자 좀 있고 싶은데 누군가 늘 집에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결혼하고 몇 개월 후 처음으로 어머님 아버님이 집을 방문하셨다. ‘시월드’라는 편견 없이 내 친부모님을 대하듯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어머님은 내가 빨리 정 붙이기 바라는 마음으로 하신 말씀이셨겠지만 듣는 내내 마음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밴쿠버는 한국보다 훨씬 더 공기가 좋아.”
“여기는 수돗물 그냥 먹어도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몰라, 한국은 그냥 이렇게 못 마시잖아”
“캐나다가 애기 키우기 참 좋아. 어후, 요즘 한국은 살기 무서워 보이더라“
캐나다가 세상 좋은 나라다 하시는 그 말 끝에 “한국보다”가 들어가는 게 거슬렸다. 한국 떠나 사신 지도 오래되셔서 그 강산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모르실 텐데, 이전 경험들과 최근 뉴스로 접한 (부정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다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불편했다. 한국이 그렇게 최악이라면 나는 마치 그곳에 가족을 버리고 온 죄인처럼 느껴졌다. 어디든 내가 경험해서 좋아야 좋은 거지 누가 좋아하라고 하면 그냥 좋아지나.
“동생도 데리고 사느라 고생이 많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얘도 원래 살던 곳인데 집에서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얼마나 불편하겠니.”
네? 아드님이 불편하실 것 같으면 작은 방이라도 구해주셨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대화 중에 시동생이랑 사는 부분을 언급하신 것은 결국 내가 들어와서 당신 아들이 불편하지 않겠냐는 그 말을 하고 싶어서였구나 싶었다.
원하지 않았던 시월드 도장이 내 마음이 꽝 찍혔다.
그렇게 갈등은 남편이 아닌 남편과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참고 참다 어느 날 나는 이 모든게 불편하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이.해.가.안.간.다.는.표.정.을 지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