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리비아
고산병 약 때문일까? 기분이 착 가라앉아서 누구와 말 한마디 섞기도 싫다. 페루를 떠나 육로로 볼리비아에 가는데, 출입국 수속이 너무 오래 걸려 피곤해졌다. 빨리 코파카바나 (Copacabana)에 도착해서 맛있는 점심도 먹고 카페에도 가고 했으면 좋겠다.
코파카바나행 버스를 타려고 터미널 승강장 앞에서 기다리는데 너무 추웠다. 여차하면 껴입어야지 하며 백팩에 넣어둔 기모 바지를 꺼내, 그 자리에서 레깅스 위에 겹쳐 입었다. 내 옆에는 독일 걸이 한 명 서있었다. 그녀도 몹시 추워하면서, 자기도 레깅스를 한 겹 더 입었다고 했다.
코파카바나 호스텔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쳤는데, 마을을 돌아다니다 길에서도 그리고 호스텔 샤워실 앞에서도 마주친다. 내일 섬 투어에서도 일행으로 다니면 좋겠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손톱 발톱도 자르고 나니, 이 작고 썰렁한 호스텔 방이 그렇게 편안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래도 나 혼자 쓰는 것이라 이런 소소한 것들을 할 수가 있고, 그래서 편안한 것이다. 비록 화장실과 욕실은 공용이고 침대는 심하게 삐걱거리지만.
그거야 아래층에 누군가 있다면 거기서 성가실 일이지, 내가 성가실 일은 아니다. 난 이방에서 그냥 내게 주어진 자유를 누리면 된다. 2박에 17달러인데 일정이 꼬여서 내일 못 자고 떠나니, 1박에 17달러를 지불한 셈이다.
왜 사람들이 푸노보다 코파카바나가 더 낫다고 하는지 알만한 풍경이었다. 어제 푸노에서 본 티티카카 호수는 날이 흐린 탓인지 하늘과 호수 색깔이 선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 코파카바나에서 마주한 티티카카는 너무나 쨍한 빛깔이었다. 화사한 햇빛을 받은 호수는 청명한 하늘과 새하얀 솜구름 아래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투어 프로그램은 푸노의 것이 더 좋았다. 이곳의 점심 레스토랑은 멀리서 보기에는 근사했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너무나 허름했다. 의자들은 하나같이 속이 터져 솜이 삐져나와 있었고, 테이블은 버려진 것을 주워다 모아놓은 것 같았다. 유리창도 깨끗하지 않았고 음식은 비교가 안 될 만큼 성의가 없었다.
투어 비용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페루와 볼리비아라는 서로 다른 나라의 다른 관광 인프라 때문이었을까?
식당 밖에 나와 내려다본 호수는 서늘하도록 파랗다. 고산지대라서 그런지, 조금 덜 활동적이고 더 게을러져서 별로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함께 간 독일 걸은 걸어서, 나는 보트를 타고, 다른 선착장이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새로운 선착장에 내려서 사람들이 가는 대로, 높이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도중에 몸을 돌려 내려다본 해안의 풍경은 너무나 청량했다. 그 길을 계속 올라가면 길을 따라 지역민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직물과 의류 소품들을 팔고 있었다. 난 거기서 진빨강 손뜨개 머플러를 하나 샀다.
끝내 통성명을 하지 않은 그 독일 걸과 이 여정을 함께 했다. 투어를 마치고 페리 선착장에 도착하니 4시 20분, 라파즈행 5시 버스를 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 주변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가겠다고 했다. 나도 하루를 더 묵었다면 분명, 거기서 시간을 좀 보내고 싶었을 만한 위치와 분위기였다.
여행사에 맡겨둔 짐을 찾아, 낑낑거리며 언덕을 올라간 끝에 버스를 탔다. 화장실에도 들르고 물도 샀으니, 라파즈행 버스 여행 준비 끝. 버스는 여행사에서 얘기한 '델 수르 노르떼'는 아니고, 라파즈에 가는 표만 있으면 아무 거나 골라 타는 버스였다. 버스가 티티카카 호수를 끼고 돌 때, 바깥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는데, 차만 타면 왜 이렇게 졸리는지, 풍경은 졸음 속에 묻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