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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하 Feb 01. 2022

추억을 되새김질하다


  몇 해 전부터 마음 한 구석에 숙제처럼 자리 잡고 있던 일이 있었다. 앨범 정리…….

결혼 전 각자가 가지고 있던 남편과 나의 앨범도 벌써 오십 고개를 넘어가며 여기저기 곰팡이에 손때까지 묻어 늘 마음에 걸렸다. 마침 딸이 미국으로 가며 앨범을 한 박스나 주었다.

  “무슨 앨범을 이렇게 많이 샀어?”

  “결혼사진을 정리하려고 앨범을 고르는데 낱개로 사는 것보다 박스로 사는 것이 훨씬 쌌어.”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암만해도 밴댕이 속처럼 손이 작은 나는 안 닮은 딸이다. 

  하지만 ‘세월의 묵은 흔적들을 정리해야겠다.’ 하는 마음도 그때 뿐. 또 몇 해가 훌쩍 지나버렸다. 나라를 구할 만큼 바쁘지도 않으면서 얼른 손이 가지 않았다.

  얼마 전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책들을 정리했다. 자연스럽게 책장 맨 아래 누구도 찾는 사람 없는 외로운 앨범에 눈이 갔다. 사연 많은 주인의 잦은 이사로 앨범들도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 힘들었나 보다. 여기 저기 상처투성이다.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간다고 책장 맨 아래 칸을 지정석으로 한 앨범을 까만 곰팡이까지 친구 하자고 자리 잡고 있었다. 핸드폰이 등장하고 사진도 컴퓨터에 바로 저장하다 보니 앨범을 뒤적일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앨범들을 버리지도 다시 손대기도 맘처럼 쉽지 않는 애물단지였다. 그렇게 앨범들은 하루하루 머리에 흰 눈이 내려앉은 주인과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책장 정리를 대충 마무리하고 ‘이번엔 기필코 대업을 이루리라.’ 하는 굳은 의지가 식지 않도록 소파 한가득 서둘러 앨범들을 쌓아 올려두었다. 한쪽으로 치워두면 또 미룰 것 같아 늘 앉는 소파 위에 두어서 스스로 무언의 압력을 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충 보아도 열 개가 넘는 앨범 수에 기가 죽는다. 이 많은 걸 어느 세월에 다한단 말인가?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머릿속은 멍멍이가 뛰어다니듯 복잡해진다. 

  ‘사람 눈이 제일 게으르다.’ 라고 했으렷다. 부지런한 손을 격려해가며 앨범들을 종류별로 분류했다. 역시 사진이 취미인 남편의 앨범이 제일 많다. 

  결혼식 앨범과 두 아이의 성장 앨범 그리고 시어머니 집에서 가져온 시댁 가족 앨범과 유독 사진 찍기 싫어하는 결혼 전 내 앨범까지 분류하니 앨범 리모델링 규모가 어마어마해져 간다.

  하지만 어찌하리. 전쟁터에서 더 물러설 곳 없는 장수의 비장한 심정으로 우선 시댁 가족 앨범부터 시작했다. 결혼 삼십 년 만에 이 앨범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까까머리 신랑부터 신축하기 전 집의 원래 모습까지 남아있었다. 앨범 안에는 내가 모르고 있던 남편 가족사의 여러 부분이 묻어있었다. 

  시어머니의 수줍은 처녀 시절 사진과 시아버지의 청년 시절 모습도 흑백사진으로 있다. 지금은 모두 환갑을 넘다드는 나이가 된 시누이들은 금방이라도 사진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풋풋함과 건강한 모습이었다. 

  시아버지의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혼자 보기 아까웠다. 핸드폰으로 찍어 시댁 가족들 단체 카톡 방에 올렸다. 곧 가족들의 반응이 뜨거워졌다. 이십 년 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환한 모습이 정겹다. 

  나는 항상 입술을 꼭 다문 무표정한 모습의 시아버지 사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 시아버지도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분이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꿈을 덜어 자식의 꿈을 채워주는 것이 부모’라고 한다. 저 작은 체구로 얼마나 많은 자신의 꿈을 여섯 자식에게 덜어주었을지 가슴이 울컥해진다.

  나는 아직 앨범들에 맞서 전쟁과 휴전을 반복 중이다. 접착식 앨범에서 사진을 떼어 내려면 네모난 모서리를 잡고 힘을 주어 떼어야 했다. 사진 모서리에 손톱 밑이 반복적으로 찔렸다. 이틀 정도는 손톱 밑이 아려서 사진 정리를 하지 못했다.  지금은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정리 하고 있다. 처음에는 겹치는 사진들은 버리면서 사진 정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겹쳐지는 사진은 겹치는 대로 또 잘못 나온 사진은 잘못 나온 대로 그대로 정리를 했다. 

  사진도 역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역사가 모두 바른생활만은 아니었으리라. 잘한 일도 있을 것이고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참으로 지지리 못난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지금 이 자리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앨범 정리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다. 온방 가득 어질러진 과거의 사진들 속에서 미래의 우리 모습을 그려본다. 지나간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나은 오늘이었기를 소망한다. 다가올 내일이 내 몫으로 허락된다면 실수 많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오래된 흑백 사진 속의 우리 모습이 화려한 컬러사진으로 변하듯 우리의 삶의 모습도 좀 더 고운 빛으로 되새김질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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