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마지막 날이다. 며칠 전 탁상 달력을 넘겨 유월에 있는 남편 생일을 기록해 두었다. 미리 넘겨둔 탁상 달력과 오월을 알리는 벽에 붙은 달력 사이에서 순간 흔들렸다.
“내가 몇 월을 산거지?”
오월과 유월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나는 매일 아침 감사 일기를 쓴다. 분명 일기 머리에 날짜도 기록한다. 하지만 서른 번의 오월을 기록했으면서도 내 기억력은 순간 흔들릴 만큼 자신이 없다.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실수가 잦아지며 난감해질때가 많다.
오월이 간다. 봄은 짧고 강렬하다. 우리가 봄을 느끼는 시간은 이별을 눈앞에 두고 가쁜 숨이 턱에 차는 순간이다. 찰나처럼 지나가는 아름다움이었기에 아쉬움이 더 강렬한지도 모른다. 세련되지 못한 미숙함과 익숙하지 못한 애틋함이 공존하는 시절이다. ‘혹시 봄인가?’ 하고 몇 발자국 앞서 가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아직 아니야.” 하며 동장군이 시샘을 한다. ‘이젠 진짜 봄이다.’ 하고 움츠린 가슴을 풀어 헤치면 어느덧 장대비처럼 굵은 빗줄기가 대지를 적신다. 길고 지루한 장마가 시작되고 여름이 온다. 그렇게 봄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봄은 오월과 유월의 달력 한 장 사이에서 사라진다.
동장군의 위력에 죽은 것처럼, 마치 잠이라도 든 것처럼 보이던 자연은 봄의 기운에 마음껏 기지개를 편다. 장작개비처럼 거칠고 메마른 몸뚱이에서 나무는 연한 새싹을 겨워낸다. 그 끔찍하게 차디찬 기억을 품어 안고서도 새로운 생명을 뿜어낸다. 모진 겨울을 홀로 버티며 저 연한 빛을 피우는 나무의 생명력은 참으로 경이롭다. 봄은 인내한 세월의 보답이다. 비단 옷감처럼 광택 도는 아름다운 색은 화려한 봄의 빛깔이다. 봄을 노래하는 새들의 열창이 하늘 가득 울려 퍼진다.
혹독했던 겨울을 보낸 사람에게 보내는 신의 선물이 봄이다. 봄은 온 몸의 뼈마디가 오그라들던 시간을 이겨낸 사람의 가슴에 빛나는 훈장이다. 봄은 겨울잠에서 방금 깨어난 동물처럼 사람의 정신을 몽롱하게 한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가슴 떨리는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다. 봄은 겨우내 머릿속에 밀어두었던 계획들을 하나 둘 끄집어내게 한다. 그리고 행동하게 한다. 봄은 인생의 가슴 떨리는 첫 걸음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올 거라는 봄을 향한 간절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길고 몸서리치던 인생의 그 기나긴 겨울밤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인생의 봄이 지나간다. 봄을 깨닫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길지 않다. 인생의 봄은 너무 짧아서 아쉬움만 남는다. 인생의 한참을 보낸 후에야 그 시절이 봄이었음을 깨닫는다. 바람처럼 흩어진 그 순간이 인생의 봄날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인생이다. 가끔은 쉽게 일어서지 못할 만큼 오랫동안 넘어질 때도 있다. 가끔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 끝이 안 보이는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에 울부짖을 때도 있다.
힘든 고비 때마다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몸 어딘가에 기억되어 있는 봄의 온기 때문이다. 우리 몸 어딘가에는 봄의 아름다웠던 기억을 추억하는 장소가 있다. 찰나처럼 사라지는 짧은 봄을 우리 몸은 기억한다. 그 봄의 찬란했던 무지개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 어딘가에는, 언젠가는 눈부시던 그 봄이 돌아올 거라는 그 기대감으로 숨 가쁜 오늘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꿈결처럼 아름다운 나의 봄이 가고 있다. 우리는 이별 인사를 나눌 준비를 한다. 수만 가지 품격을 갖춘 이별의 언어를 준비하면서도 끝내 단 한마디도 뱉어내지 못한 연인처럼 담담하게 서로의 눈빛을 바라본다. 애써 차분한 미소로 손을 흔든다. 봄이 손을 흔든다. 나는 봄에게 얼마나 머물 수 있는지 묻지 않는다.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는지도 에둘러 물으려 하지 않는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조용한 미소로 손을 흔들 뿐이다. 좋은 시절이 오면 오래오래 함께 하자는 인사를 건넬 자신도 없다. 이제 나의 봄은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 같은 연약함뿐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나의 오월을 기억하게 하심에 감사하다.
오월아! 잘 가. 찰나 같은 청춘의 시간들이여 안녕.
나는 여전하게 넘어지고 미끄러지겠지만 너를 추억하며 다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을 거야.
고맙다. 나의 치열했던 봄날이여!
인생의 봄날이 흘러간다. 나의 봄날이 저만큼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