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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하 Nov 08. 2022

소주 한잔


  “은하냐?” 

  “네. 오빠 잘 계셨어요?”

  “그래. 나는 잘 지낸다. 국밥에 소주 한잔하고 있다.” 

  “점심이 많이 늦으셨네요. 혼자 드시는 거예요?”

  “그럼. 내가 혼자 먹지 누구랑 먹겠냐?”

  서울 사는 사촌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마도 내가 전화로 오빠와 통화를 나눈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다른 형제들에게서 가끔 오빠와 통화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형제간에도 별로 존재감이 없는 나는 오빠 소식을 한쪽 귀에 담는 정도였다. 나의 모난 성격은 스스로 나서서 무슨 행동을 잘하지 않는 소심함 자체이다. 부족한 표현력으로 껄끄러운 오빠와의 관계가 편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사촌오빠는 여순사건 즈음에 태어났다. 친정아버지 둘째 형의 유복자다. 군 복무 중이던 오빠의 아버지는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돌아가셨다. 임신 중이던 오빠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셨다고 한다. 그 시절 친정아버지는 중학생이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지서에 끌려다니셨다. 결국 할머니가 둘째 아들 곁으로 떠나시며 집안은 풍비박산되었다. 열다섯 살 이었던 어린 친정아버지는 벌교로 시집간 막내 누나 집까지 수십 리 산길을 혼자 걸어 도망을 갔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아들 셋, 딸 셋의 막내로 태어나셨다. 돌아가신 둘째 형에 대한 말씀을 거의 안 하셨고 나는 사촌 오빠의 존재로 그분의 아버지에 대해 언뜻 듣기만 했다. 직업 군인이었던 친정아버지는 그 시절 존재하던 연좌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죽은 형에 대한 애증의 감정은 사무치게 깊었던 것 같다. 아픈 손가락처럼. 

  그리고 그 분풀이는 폭력으로 사촌 오빠에게 들어냈다. 부모 없는 서러운 세월을 눈칫밥으로 자란 오빠의 뒤틀린 시간을 나는 가히 세 치 혀로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오빠는 우리의 어린 시절 흑백 사진 귀퉁이에서 가끔씩 기억의 한 자락을 차지했다. 죽은 형의 자식을 품지 못한 친정아버지도, 매 맞는 오빠를 숨겨주었다는 친정어머니도, 태생부터가 서러웠던 오빠에게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쉽지 않은 명제였을 것이다.

  나는 작은 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오빠를 보면 짐작은 간다. 큰 키에 영화배우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오빠는 걸어 다니는 조각 모델 같았다. 촌수 계산이 안 되던 어린 나는 나이가 많은 오빠를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작은아버지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오빠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 두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마음 한편이 흐뭇해지기도 했다. 아마도 오빠가 누구보다 행복해지기를 소원했었나 보다. 그리고 결혼에 실패하고 다시 혼자 산다는 소식도 바람에 묻어오듯 들려왔다.

  명절에 가끔 오던 오빠는 우리 부모님마저 모두 돌아가시고 더욱 연락이 뜸했다. 남동생이 오빠가 수술할 때 보호자로 서명했다고 전해주어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짐작만 했다. 그런 오빠가 처음으로 내게 직접 전화를 한 것이다. 말재주 없는 나와 술 취한 오빠와의 어설픈 통화는 대화로 이어지기보다 한참씩 끊어지는 침묵이 더 많았다. 서로의 흐릿한 기억 속에 공유되는 비릿한 아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빠가 들려주는 기억에도 없는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수화기 너머로 듣고 있으면서 나는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아직도 혼자라는 시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방인을 보는 것 같았다. 과거의 시간에 매여 고통의 언저리를 울며 맴도는 미아를 보는 것 같았다. 오빠를 보면 친정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무겁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는 늘 희생되어도 된다는 당연함이 난 싫다. 대의를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함부로 버려지는 작은 부스러기들이 아프다. 한 많은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목숨을 바친 분들의 희생이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오빠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고 태어날 내 자식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반란에 참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나라를 위함이 만삭의 아내와 차가운 세상에 홀로 버려지듯 몸부림치며 살아야 했던 아들과 어머니의 죽음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 같다.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도 다시 재조명된다고 한다. “친정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하고 싶은 말씀이 많았겠다.”라는 생각에 씁쓸하다.  

  끊어질 듯 질기게 이어지던 우리의 대화는 한참 더 계속되었다. 나도 오빠도 어쩌지 못하는 시절 속에 너무 많이 길들어진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했는데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헤매는 문장처럼 우리의 불안한 목소리 너머로 한 세월이 그리고 한 날이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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