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이다. 서른 번째 결혼기념일을 자축하기 위해 머리 허연 우리 부부는 시내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옷장 앞을 한참 서성였다. 조금은 숨쉬기 불편하지만 아끼던 옷을 꺼내 입고 불뚝한 아랫배에는 힘을 잔뜩 주었다. 모처럼 산발한 머리도 다듬고 딸이 사준 **핸드백을 손에 들고 길을 나섰다. 나는 약속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오늘도 넉넉한 나만의 시간을 품에 안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찻집에 들어섰다.
찻집에서 자리를 둘러보다 우연히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그 사람이었다. 잔잔한 미소로 늘 그랬듯이 잘 지냈냐고 물어오는 그의 눈웃음은 여전히 사람을 빠져들게 했다. 얼마 만인가? 우리 사이에 긴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서로에게 다시 몰입되어갔다. 그의 선한 눈가에 머물던 깊은 슬픔을 바라보며 울컥하는 서러운 감정까지 우리 사이에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도 같았다.
21세기의 구석진 찻집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20세기의 어느 한 시절로 되돌아갔다. 빛바랜 기억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제 만난 연인처럼 나지막이 서로의 일상을 나누었다. 삶의 고뇌와 혼란스러움을 굽어진 등허리에 매고 반백이 되어 그와 마주하고 있었다. 삼단 같던 내 검은 머리는 흰 눈꽃이 소담스럽게 피었고 흑백 사진 속의 그는 담담하게 미소 짓고 있다. 그와 함께했던 시절과 해후한 공간의 시차만이 우리 주변을 어색하게 맴돌았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위해 세상 밖으로 외출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끊임없이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순례자란 무엇보다 먼저 발로 걷는 사람 나그네를 뜻한다. 순례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털어낸다.” 법정 스님의 『걷기 예찬』 중에서
그는 스스로 수없이 던지던 이 질문에 과연 답을 얻었을까? 나의 젊음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몸과 마음이 함께 하지 못하는 단절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법정 스님을 만났고 맑고 순수한 그의 문체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의 책을 품에 안고 잠이 들기도 했다. 법정의 책에서는 반복되는 소재의 글도 많았다. 재탕되는 사건들이 따분하지 않고 스님의 일상이 눈앞에 그려지며 이해가 되었다. 그 좁은 산사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기를 바라는 내가 더 옹졸하게 보였다. 독자 스스로가 작가를 위로하고 있었다.
내 삶은 그의 공백을 느낄 틈도 없이 정신없이 흘렀다. 결혼이라는 낯선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의 책을 다시 접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되물을 용기도 없이 살았다. 몇 해 전 그의 다비식이 순천 송광사에서 TV로 생중계되었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불길 속에 던져지던 그의 육신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오늘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서로의 추억이 새롭게 떠오르며 젊은 날의 나의 고뇌함도 함께 맞물려 다가왔다. 만남과 헤어짐이 잦은 사람 관계에 적응 못하던 나의 고립된 성격은 오히려 책과 더 친밀했다. 책 속에서 그의 생각을 읽고 나의 불안을 함께 나누었다. 다시 오지 못할 젊음의 그 아름다운 시절에 나는 무슨 고민이 그리도 많았을까? 지나고 보면 참 부질없는 뜬구름인것을.
찻집 문이 열렸다. 한 팔 가득 꽃다발을 안고 들어서는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가만히 책을 덮었다. 손끝으로 그의 책을 더듬으며 '저 정도 꽃이면 얼마나 할까? 차라리 나한테 현금으로 주지.'라는 머릿속 계산기를 복잡하게 두들긴다. 입가에는 남편을 향해 누구보다 선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찻집 구석에 놓인 그의 낡은 책은 철없던 시절을 함께 뒹굴던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 같았다. 청춘인 것도 모르고 흘려보낸 나의 젊음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 누리는 반백의 여유가 나는 참 좋다. 비록 내 몸은 나날이 초라해지고 머리는 더욱 속물이 되어가도 마음만은 충만하게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