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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Oct 22. 2020

어쩌면 우린 모두 위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국민참여재판 변론을 했다.


원래 다른 변호사님이 맡은 사건이었는데, 신문할 증인수가 많고 사건기록이 방대해서

내가 국민참여재판 당일만 일부 업무를 분담하는 의미에서 추가로 국선 변호인 선정이 되었다.  

  

가끔 그런 사건이 있다.

했다 안 했다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한 것은 맞는데 이것이 처벌할 일이냐가 쟁점이 되는 사건.

그 사건을 맡은 변호사님도, 나도,

직업을 떠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는 그 사건 무죄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재판을 하면 반드시 유죄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사건이었다.    

 

불리한 요소가 많았는데, 법조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 사건을 들여다보면 법이 이런 사람 처벌하라고, 이런 행위를 처벌하라고 만들어졌나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사건.




유죄가 인정되면 그는 구속되어 장기간 징역살이를 해야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인생이 망가질만한 다른 제약이 부가될 상황이었다.    


이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일반 국민의 법감정에 부합하는 것인지,

이것을 범죄라고 할 수 있을지 평범한 국민의 시각에서 판단받기를 원해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했다.


증인 여러 명을 신문했고 피고인 신문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증거로 제출된 CCTV 영상을 보는 것도 2시간 넘게 걸렸다.


배심원을 선정하고.. 검사와 공방을 이어가며 피고인의 운명이 걸린 재판에서 증인신문을 했다.    

배심원이 우리에게 호의적인 눈빛인지를 살피고, 허를 찌르는 검사의 논리에 마음속으로 암담해하기도 하고 적대적인 증인의 태도에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재판부의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에게 불리한 예단이 아닌지 염려도 되고.. 이렇게 처음에는 판사, 검사, 배심원, 피고인, 증인.. 모두 다른 위치에 정확히 서 있는 존재들로 보였다.     


재판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저녁까지 먹고 다시 이어서 재판을 하게 되었다. 밤 9시가 넘고 10시가 다 되어가고 모두 지친 얼굴이었지만 각자가 맡은 일을 담담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오늘 법정구속이 될지 알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는 피고인도, 누군가의 엄마 아빠일 테지만 격무에 시달리느라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주 이렇게 야근할 검사와 재판부, 무려 12시간째 앉아서 재판 과정을 지켜보느라 지쳤을 배심원들도, 내 옆에 앉아서 장시간 힘든 신문과 변론을 하고 있는 내 동료 변호사도

그리고 나도, 우리 모두 힘을 내야 하는 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배심원들, 검사, 재판부, 동료 변호사님과 나, 피고인, 증인들은

각자 인생과 일상의 무게를 가지고 자기만의 사막을 건너고 있는 중

이 법정에 우연히 함께 모인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가 입장은 다르지만

한 가지 일을 위해 이 공간에 있는 것에 알 수 없는 연대감 같은 것이 들었다.    


잠깐 방청을 했던 우리 사무실 변호사님은 내가 평소 사무실에서 농담을 하는 모습만 보다가 법정에서 반대신문을 하는 것을 보고 카리스마를 느꼈다, 시크했다 말을 하기도 했다. 아마 배심원들 눈에도 내가 변호인의 역할을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증인신문을 하는 동안

내 친정아버지는 폐를 절제하는 암수술을 하고 있었고,

엄마가 평소보다 늦게 오자 아들은

남편이 집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와서 내 사무실을 향하고 있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으로 그 법정에 있는 동안 엄마이자 아내이고 누군가의 형제자매이자 지인으로서의 위치를 실감하게 하는 일상 문자와 톡이 오고 있었다.    


저녁식사시간에 잠깐 통화가 된 아들은 아직 재판을 마치지 않았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 말에 울음을 터트렸다.


법정에 차분히 앉아 있으면서 내 마음은 잠깐 아버지 병실도 다녀오고 아들이 어둠 속에서 잘 돌아갔을지 어느 길을 더듬기도 했다.    


재판을 마치고 집에 가니 11시가 다 되었었다.

이제 피고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고인에게 무탈하게 된다면 나에게 연락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새벽 1시 30분쯤 피고인에게 무죄를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치 피고인의 사활에 내 아버지의 명운이 걸린 것처럼 의지했던 걸까.    


피고인에게 잘 됐네요..라고 말하는데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지 모른다.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조금 더 힘이 필요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린 서로를 잘 알지 못할지라도

조금씩 보듬어 주면서 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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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이후

아버지는 2022년 9월 28일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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