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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Mar 02. 2024

[2-13] 부부가 함께 축구를 읽고 씁니다.

부부가 함께 축구를 읽고 씁니다.



공간의 가장 구석진 위치에 자리한 커다란 8인용 테이블 한켠에 남편과 내가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원두 세팅을 마친 뒤에 커피를 내리고 자연스럽게 노트를 펼쳤다. 손가락 위에서 굴러가는 연필 소리와 컵 안의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가사 없는 재즈 소리가 감싸는 이 공간에서 시작하는 수요일의 아침이다.




눈썹을 찡그리고 폈다가를 반복하면서 무언가를 계속 써내려갔다. 우리 부부에게 비밀스러운 또 다른 일이 생긴 것이다. 카페는 성수기와 비수기가 비교적 확실한 자영업 중의 하나다. 카페의 아래 층에서 운영 중인 축구센터 역시 마찬가지다. 거의 매일 변함없는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지만, 사실은 아주 불확실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떤 새로움으로 메꾸어 나갈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우리의 삶을 이야기로 꺼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반복의 일상 속에서 비일상을 꺼내어 보는 일.




그렇게 축구를 하던 남편은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글과 가까이 지내던 나는 돌연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축구를 읽고 써내려갔다.




2020년 여름, 10년을 그라운드 위에 섰던 남편이 은퇴를 선언했다. 큰 부상이 한 번 있은 후로 잔부상이 계속 그를 괴롭혔고, 결국 더 이상 뛰기 어렵다는 결정을 내렸다. 쉽지 않은 고민이었지만, 결정을 내리고 나니 사실 속이 시원했다. 더 이상 아픈 곳 여기저기 피도 통하지 않을 만큼 테이핑을 하면서 참고 견디며 뛰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남편은 은퇴 후의 한치 앞도 모를 삶을 그리기에 머리가 복잡한 듯 보였다.



"난 가끔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을 때 책을 읽으면 머릿 속이 더 명확해 질 때가 있더라고. 책을 좀 읽어보면 어때? 아주아주 쉬운 책, 살면서 읽어보지 않을 것 같은 엉뚱한 책이면 더 좋고."



나는 그럴 때 늘 책 속에서 방향을 잡곤 했기에 남편에게도 그것을 권했다. 책이 언제나 답을 주는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어떤 방향을 주는 데 책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앉아서 같이 읽어보자고 권했다. 아이가 있어 책 읽을 시간조차 없다고 생각했는데 휴대전화를 내려 놓으니 하루 30분, 아침 시간도 꽤 충분했다. 그리고 우리는 얻은 생각들을 짧은 글로 옮겨 몇 곳에 적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우연치 않게 좋은 기회가 닿아 스포츠 칼럼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유명한 선수들과 기자 사이에 우리가 글을 쓸 수 있게 되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처음엔 이 믿기지 않을 일이 신기하다가 이내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좋은 글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일까.




글쓰기에는 마음을 부지런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꾸준히 쓰다보면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것을 다시 돌아가 유심히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느낀다. 진짜 좋은 글이라면 잘 써진 글이 아니라 멈추고 돌아보게 만들 만큼 마음을 울리는 깊은 글일테고, 우리는 그걸 잘해왔고, 잘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일테니 내가 에디터를 하겠다고 자처했다. 그렇게 또 맨 땅에 헤딩을 했다. 카페를 열고 얻게 된 또 다른 '일'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삶의 많은 부분이 채워갔다. 감정과 생각을 속으로만 삼키고 살던 남편의 마음을 밖으로 꺼내어 울고 웃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일상적인 대화가 삶의 깊이로 확장되기도 했다. 누군가가 보는 글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꺼내고 싶은 이야기들을 담아갔다.




카페의 문을 열고 세번 째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매일 아침 내린 첫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우리의 이 소중한 감정이 휘발되지 않도록 꽁꽁 글로 묶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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