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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ob Nov 07. 2024

살아. 사는 거야.

자주 나가고, 자주 흔들리고, 또 자주 돌아오십시오.


    이제 새벽이면 겨울 냄새가 조금 납니다. 커피도 따뜻하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집의 강아지는 이불속으로 몸을 구겨 넣습니다. 옷장을 정리합니다. 금빛 잎사귀는 바닥을 뒹굽니다. 어둠이 빠르게 드리우고 뜨거운 생명의 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해의 끝이 보입니다.


 1년밖에 살지 않았던 캐나다가 그토록 그리운 이유는 이곳이 너무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나둘씩 말을 건넵니다. ‘결혼은?’ ‘직장은?’ ‘진급은?’ ‘진로는?’ ‘돈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슴없이 잔돌을 던집니다. 시끄럽습니다. 안 그래도 내면의 소리에 마음이 복잡한데, 밖에서도 요란이니 정신을 못 차리겠습니다. 엄살인지 성장통인지 분간이 되지 않은 채로 그저 걷기 시작합니다. 걷고, 걷고, 또 걷습니다. 그쪽이 아니라고 열심히 뒤에서 잔돌을 던지는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저는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나는, 아직 살고 싶어’


탕자(蕩子), 살다


    ‘나는 왜 없지 않고 있을까?’ 가끔 삶이 낯설어집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수없이 날아오는 잔돌들 사이에서 피어납니다. 각자의 삶에서 나만의 답을 찾아내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겠습니다. 생명(生命), 생(生)을 명(命) 받아 이 땅에 발을 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는 삶이 옳은 삶인지는 함께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삶이 그토록 모호하고 그토록 불안합니다. 삶은 원래 모호하고 불안합니다. 그 모호하고 불안한 삶을 먼저 살아온 사람들이 나름의 성공사례들을 가지고 규칙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고, 환경을 만들고,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려인지 자기애인지 그 나름의 안정적인 마을에 우리를 종속시키려 합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복과 안전을 그럴듯하게 약속하며 말입니다.


 성경의 탕자(눅15:11~)가 어떤 이유로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나갔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탕자가 정확히 어떤 생활과 어떤 일을 하다가 탕진을 했는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이 대목에서 탕자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탕자는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떠납니다.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하고 그 결과에 영향을 받고 그 끝에 있을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떠납니다. 태초의 에덴동산에서 부족함 없이 지내는 최초의 인류의 삶은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안에서 넉넉히 먹고, 다른 생명과 어울려 살고, 그 안의 것들을 돌보고 관리하는 삶이겠습니다. 풍족한 아버지 집 안에서 지내는 탕자의 삶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집을 떠난 먼 지방의 삶은 탕자가 차마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알 수 없음으로 뒤덮인 미지의 세계는 분명 모호하고 불안하고 독립적이지만, 그렇기에 비로소 ‘살아 있음’이 됩니다. 스스로 길을 찾고,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주체성’(主體性). 자주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는 하늘이 진짜 넓은 하늘이 되는 법입니다. 태초의 인류라고 달랐을까요?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는 삶 또한 태초의 그들이 차마 상상하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었을 겁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했지만 죽음 역시 그들에겐 예측할 수 없는 영역이었겠지요. 그들은 모두 그 넓은 하늘을 살아 보기 위하여 본토 친척 제 아비의 집을 떠납니다. 이 땅의 유일한 존재로 생(生)을 명(命) 받아 태어난 이상 기성품은 원치 않습니다. 내 세계가 아닌 곳에서 애완처럼 사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나’는 ‘나’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고, 진리를 발견하려는 탕자와 인류의 떠남은 결코 이상하지 않습니다. 살기 위해 탕자는 떠났고, 살아 있기에 탕자는 떠났습니다.


 Biophilia,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자연히 ‘살아 있는 것’에 이끌리고, ‘살아 있는 것’은 본성에 ‘살아 있는 것’을 선망합니다. 죽어 있는 것일수록 더욱 생기와 생명력과 살아있는 것을 동경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새겨진 본능이자 특수한 능력이자 속성입니다. 살아 역동하는 것이 크게 매력적이고 힘이 있고 찬란함을 약속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역동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태초의 인류는, 탕자는, 우리는, 살아 있기에 살아 있음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태초(胎初), 생명의 시작


    여기서 ‘탕자’(蕩子)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탕’(蕩)의 뜻에는 방탕함도 있지만 ‘흔들림’ 또한 있습니다. 떨림과 흔들림이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 물리현상인만큼 탕자의 흔들림은 역시나 살아 있는 존재로서 당연한 것이겠습니다. 하지만 그 흔들림에 이끌려 진정한 삶에 자신의 몸을 내던진 순간 탕자는 더 큰 흔들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순과 역설, 정(正)과 진(進)으로만 흘러가지 않는 의문투성이인 삶의 이면을 맞닥뜨리며 말입니다. 삶은 모호하고 불안합니다. 삶은 수수께끼며, 삶은 때때로 가혹합니다. 삶은 개인을 결코 배려하지 않으며, 삶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더 무심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초록을 뛰쳐나갔던 이들이 이러한 삶의 이면을 마주하고 점차 지치고 상처받고 실망하고 탈진하고 끝내는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낙망과 좌절, 상실과 후회, 수치심과 죄책감에 주저앉게 됩니다.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발을 내디뎠지만, 그 길 위에서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안에서 힘차게 역동하는 흔들림은 멈췄습니다. ‘탕진’(蕩盡), 마침내 흔들림을 다하게 된 것입니다.


 흔들림의 끝과 생각의 끝이 함께 거슬러 닿은 곳은 ‘살아 있음’으로 초록을 뛰쳐나가기 전의 상태입니다. ‘근원’(根源), 물줄기가 나오기 시작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죠. 그곳은 ‘태’(胎) 밖으로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곳은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탄생의 흔적인 배꼽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살핌으로 생(生)을 명(命) 받게 되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호흡으로 생(生)을 명(命) 받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 생(生)을 명(命) 받기 이전에 우리는 ‘사랑으로 잇닿아 맺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어떤 생명도 이 근원에서 벗어난 생명은 없습니다. 잇닿아 맺어진 사랑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자 우리 존재의 처음이자 여전히 우리 살아 있음의 근간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 어느 누구도 예외를 둘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자격을 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존재의 심연에 잠잠히 침잠하면, 언제든 그 태초의 사랑을 떠올리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생명에게 영원히 사실로 남아 있을 생명의 ‘고향’(故鄕)이자, 모든 생명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생명의 ‘아버지’입니다. 이미 그 초록을 뛰쳐나왔어도 상관없습니다. “사랑으로 탄생한 존재” 이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길 위에서 흔들림을 다한 탕자는 아버지가 계신 생명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생명이 들을 수 있는 사랑에 자격과 예외를 스스로 논했지만, 자신의 실체를 설명하는 진리에 여지없이 환영받았습니다. 역시나 그 생명 탄생의 진리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생(生)을 명(命) 받았다는 것은 태초의 사랑과 기쁨의 잔치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태초’(太初)는 사랑으로 가득한 우리 생명의 ‘태’(胎)‘초’(初)입니다. 그 사랑의 ‘태초’(胎初)는 변함이 없습니다. 왈가왈부 어떤 말을 따로 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언제나 우리를 환영하고, 언제나 우리를 환대합니다. 다시 한번 생을 불어넣는 진리의 속삭임만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너는 사랑으로 탄생한 존재다.” “너의 생명은 여전히 사랑이다.”


생명(生命), 다시 살아


    그 이후 탕자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성경은 고향에서의 환대 그다음 이야기를 그리지 않습니다. 모호하고 불안하고 독립적인 미지의 세계에서 흔들림을 다했던 탕자는 이제 그 풍족한 고향 아버지 밑에서 고분고분 지냈을까요. ‘살아 있음’에 대한 꿈을 접고 길 위에 발을 내딛을 것 없이 그저 자리만을 지키며 지냈을까요. 사실 그렇게 ‘종’ 대접을 감수했던 탕자였습니다. 이제는 무엇에 얽매여 누군가를 따라 움직이는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며 고향으로 돌아간 탕자였습니다. 하지만 고향의 아버지는 종으로 다시 들어오려는 탕자를 여전한 ‘자녀’로 받아들입니다. 이건 다시 아비 품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받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생명의 고향에서 사랑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은 다시 살게 하는 사랑,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종? 죽음? 아니, 넌 자녀야. 살아. 넌 살아. 사는 거야” 다시 생(生)을 명(命)하는 그 순간, ‘죽은 종’이 아닌 ‘살아 있는 자녀’로 받아들여진 그 순간, 생명은 다시 사랑으로 역동합니다.


 저는 탕자가 그 더없이 큰 사랑을 업고난 후 자신의 삶을 향해 더 크게 활보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으로 탄생했다는 진리는 나를 결코 붙잡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이라는 진리는 나를 옭아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나의 길을 힘차게 내딛을 수 있는 ‘생기’(生氣)만을 더 큰 사랑으로 불어넣습니다. 삽시다. 계속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납시다. 생(生)을 명(命) 받은 자로서 내가 이 땅에서 받은 명(命)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찾아 나갑시다. 그러다가 혹 모호하고 막막하고 불안한 삶에 또다시 흔들림을 다했다면, 언제든지 생명의 고향인 태초(胎初)로 돌아갑시다. 그곳에서 다시 우리 존재의 실체인 사랑을 만납시다. 어쩌면 이 긴 인생의 여정 속 떠나고 돌아오는 건 단막극이 아니라 연속극입니다. 생명의 고향이자 생명의 아버지는 우리가 돌아올 때 여지없이 사랑으로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고, 우리가 떠날 때도 힘차게 응원하며 두 손을 흔들어 줄 것입니다.


 자주 나가고, 자주 흔들리고, 또 자주 돌아오십시오. 사랑을 등에 업은 우리 존재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하십시오. 지배하는 사랑 대신 북돋아 응원하는 사랑과 함께 꼭 ‘살아’ 나가십시오. 종이 되지 말고, 기계가 되지 말고, 고귀한 생명을 가진 ‘사람’처럼 ‘살아’ 나가십시오. 생명(生命)은 여전히 사랑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넌 사랑으로 탄생한 존재다.” “넌 자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눅15:11-24)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사49:15)


"이곳 땅 위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평생 닻을 내리기 위한 항구가 아니다. 앞바다로 나가서 거칠고도 광포한 파도를 만나 신의 품 안에서 닻을 내리기 위해서 평생 투쟁하려고 그곳을 떠나야 하는 항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스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Kazantzakis, Nikos Kazantzakis) <영혼의 자서전> 중에서


2024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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