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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만 시간을 주세요.

아닌 밤중에 입시 2

by 오늘나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미술 입시’를 검색해 봐도 까막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문과였던 내게 예체능 입시는 그야말로 암흑천지였다. 더구나 나는 학력고사 세대다. 수능은 또 무엇이란 말이냐? 첩첩산중이었다. 그렇게 답답함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언니, 내일 시간 되면 미술 학원 같이 가볼래? 몇 군데 알아봤는데 직접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올케였다. 아무것도 못하고 마음만 조급했던 나와 달리, 올케는 그새 학원을 알아본 것이다. 역시 엄마는 다르다. 그렇게 조카와 우리는 동네 미술 학원으로 향했다. 답답함이 한순간에 해소될 기대감에 어깨가 가벼워졌다. 하지만 상담을 마친 후에도 까막눈인 건 여전했다. 기역과 니은만 배우고 바로 문법공부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질문도 뭔가를 알아야 할 텐데,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를 만큼 모르다 보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상담 내내 난 놀라기에 바빴다. 미술과 관련된 세부적인 전공이 많다는 것에 놀라고, 많고 많은 전공만큼이나 대학마다 각양각색의 입시전형이 존재한다는 것에 또 놀랐다. 부모가 수많은 입시 정보에 통달하거나, 입시 컨설팅을 받을 능력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부모의 경제력과 입시 결과의 상관성이 현실적으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생 부부는 입시 정보에 통달할 능력도, 입시 컨설팅을 받아 가며 화려한 ‘스펙’을 만들어 줄 재력도 없는 평범한 직장인들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우리에게는 그저 동네 미술 학원이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학교 성적이 너무 형편없다며 노골적으로 타박을 한 첫 번째 학원, 반드시 원하는 대학교에 보내주겠다는 확신의 약속을 한 두 번째 학원, 테스트를 통해 기본기를 확인하고 열심히 해보자고 한 세 번째 학원! 어렵고 긴긴 상담에 지쳐 찾아간 떡볶이집에서 우리 셋은 한 마음으로 세 번째 학원을 선택했다. 맛있는 떡볶이에 취해 내린 섣부른 판단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역시나 아무리 생각해도 세 번째 학원이 제일 나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결정된 것 같은 마지막 순간, 조카가 갑자기 한 달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시가 급한 마당에 한 달이나 시간을 허비하려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지만, 우선은 기말고사에 집중하겠다는 조카의 말도 맞겠다 싶었다. 기말고사 공부를 하는 내내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달라고 한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조카의 결정을 진득하니 믿고 기다려 주는 멋진 고모 겸 어른이 되고 싶었다. 최소한 멋진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근질근질함을 참지 못한 나의 입은 어느새 조카에게 질문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대학이 가고 싶어 졌어?”

“그냥 가보고 싶었어요.” “그냥?” 와닿지 않는 답이었지만, 그냥 넘겼다.

“그러면 왜 갑자기 미술을 하겠다고 한 거야?”

“갑자기는 아니에요. 옛날부터 하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 조카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고 잘했었다.


“그럼, 왜 한 달이나 시간을 달라고 하는 거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생각? 무슨 생각? 다른 애들에 비하면 많이 늦은 편인데, 하루라도 빨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맞는 말씀이긴 한데, 진짜 제가 미술을 하고 싶은 건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미술 하고 싶다고 해서 학원까지 알아본 거잖아? 그런데 무슨 생각을 또 해?”

“그렇긴 한데·······.”

복장 터진다는 게 어떤 건지 그때 제대로 알았다.


“그럼 다니면 되지. 또 생각할 게 뭐가 있어? 시간 낭비 아닐까?”

“음·······.” 한참을 머뭇대던 아이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답을 했다.

“미술 하면 돈 많이 들잖아요. 근데 학원 다니고도 대학에 못 갈 수도 있고, 학원 다니다가 제가 중간에 그만두고 싶어지면 어떡해요. 형 대학 보낸다고 돈도 많이 쓰고, 엄마랑 아빠는 노후 자금도 없는데·······.”


아직 한창 젊은 부모의 노후까지 걱정하고 있었다니! 역시 조카다웠다. 자신의 결정에 온전한 책임을 지고 싶어 한 아이는, 학원을 다니다가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 봐, 학원을 다니고도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할까 봐, 책임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견하기도 했지만, 너무 앞서간 걱정으로 중요한 순간을 놓칠 것 같기도 했다. 아이의 속마음을 동생 부부에게 전해주었다.


학원에 다녔다고 꼭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라고, 대학에 못 가도 괜찮다고, 하고 싶은 미술을 즐겁게 해 보는 걸로 충분하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공부라고, 엄마 아빠의 노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부모의 마음이 잘 전해졌는지, 아이는 바로 미술 학원에 등록했다.





이 글은 2021년 11월부터 약 2년 동안 조카와 함께 했던 입시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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