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입시 4
수학을 포기하니 국어, 영어, 통합사회만 남았다. 모든 기말고사 과목에서 국어, 영어, 통합사회만 잘 보면 된다는 것은 맛있는 반찬만 골라 먹는 얌체가 된 것 같아 찝찝하기도 했지만, 내신이 안 좋은 조카의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도 다행한 일이기에 감사하기도 했다. 이렇게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의 동거는 기말고사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고, 그때마다 조카가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한 다짐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기말고사까지 남은 열흘간, 세 과목을 공부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입시 지도 초보인 내가 할 수 있는 제안은, 그저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문제를 푸는 것이 전부였다.
국어부터 시작했다. 오랜만에 펼쳐보는 고등학교 국어책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한때 금서로 지정된 소설 태백산맥이 교과서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태백산맥’이었다. 다양한 생각을 담은 교과서의 변신에 설레기까지 했다. 내가 고등학교 교과서를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부러움은 거기까지였다. 당장 내 발등의 불부터 꺼야 했다.
시험 범위는 ‘상황과 대상에 맞는 표현, 바람직한 국어 생활, 바닷속 미세 플라스틱의 위협, 설득하는 글쓰기’였다. 높임말, 피동사, 사동사와 같은 문법이 많았다. 모국어로 하는 의사소통은 문법을 몰라도 자연스레 되다 보니, 우리말 문법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영문법에 더 집중하고 익숙하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국어 맞춤법이나 문법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급기야 우리말과 글을 잘 다루어야 할 기자들의 실수투성이 기사도 자주 접하게 된다. 하지만 비판의 화살을 밖으로만 보내기엔, 나 역시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다.
‘하오체, 해라체, 주체 높임, 객체 높임, 사동, 피동’ 같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문법 용어들이 줄줄이 나왔다. 식은땀이 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설명을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특히나 외우기를 싫어하고 어려워하는 조카에게 문법은 ‘산 넘어 산’이었다. 일단은 조카가 고이 모셔두고 있던 국어 참고서와 평가 문제집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대대손손 가보로 남기려고 했는지, 중고 서점에 내다 팔아 간식이라도 사 먹으려고 했는지, 여백의 미를 살리려 했는지, 연필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문제를 풀고 정답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으로 공부를 끝냈다고 하기엔, 조카의 실력은 메워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마법사의 요술 지팡이 같은 것이 필요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고민 끝에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푸는 처방을 냈다. 하지만 풀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문제집을 다시 푸는 건 집중력 약한 조카에게는 하나 마나 한 일이었다. 지우개로 정답표시를 지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약하디 연약한 문제집은 너무 쉽게 찢어졌다. 정답표시를 문제집이 아닌 공책에 하도록 했지만, 역시나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고 같은 문제집을 또 사는 건, 그야말로 ‘돈지랄’이었다.
야심 찬 이런저런 시도들이 무산되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노트북을 켜고야 말았다. 시험공부에 대한 체계적인 계획대신 열정만 가득했던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벌였다. 문법 문제 가운데 조카가 특히나 어려워하는 것을 골라 키보드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지금 다시 하라면 절대 못 한다. 한두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조카가 어려워하는 문제는 끊임없이 나왔고, 결국 하루를 온전히 바쳤다. 엉덩이가 네모반듯하게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딱딱한 문법 문제가 조금은 더 친근하게 느껴지길 바라며, 문제에 제시된 이름을 조카와 가족들 이름으로 바꾸는 정성까지 들였다. ‘고등학교 1학년이나 된 남학생에게 효과가 있을까?’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조카는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고모, 제 이름으로 바꾸신 거예요? 정말 대단하세요. 형이랑, 엄마 아빠 이름도 있네요. 하하하”
그리고는 생각보다 즐겁게 문제를 풀었다. 눈과 손으로 문제를 푸는 중간중간, 문제를 읽어주고 답을 찾게도 했다. 귀로 들으면 눈으로 풀 때와는 또 다른 집중력이 쓰일 것 같았다. 다행히 같은 문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하자 이해와 암기에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제 위주였던 문법과 달리 읽기 단원은 본문의 양이 엄청났다. 문법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해 보였고, 결국 문제 풀이 대신 본문 이해에 집중하기로 했다. ‘바닷속 미세 플라스틱’ 단원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바닷속에 그렇게 많은 미세 플라스틱이 있다는 사실이 현실적이지 않네요.”
“그러게. 한반도보다 일곱 배나 큰 쓰레기 섬도 있다던데.”
“쓰레기 산도 있어요. 사진 못 보셨어요? 인간들은 대체 왜 그럴까요?”
“너도 인간이잖아. 네 생각엔 왜 그러는 것 같아?”
생각하는 시간을 더 갖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카의 질문에 나는 거의 매번, 역질문을 하곤 했다.
“욕심 때문 아닐까요?”
그렇게 조카와 나는 시험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이기심이 지구의 환경과 미래에 끼칠 영향이라는 우리만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문제 풀이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어째 시험공부한다고 조카와 만나기만 하면 자꾸 샛길로 빠진다. 입시 지도라는 내 본분을 자꾸 잊는다. 단세포 생물처럼.
이 글은 2021년 11월부터 약 2년 동안 조카와 함께 했던 입시 경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