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름 내내 달렸으니 맥주는 얼마든지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by 초희
그렇게 해서 나는 달리기는 몸을 만드는 운동이 아니라 마음을 만드는 운동이라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됐다고나 할까? 별다른 목표 없이 두 달 동안 설렁설렁 뛰고 나니 마음은 내가 한 일들에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 그전까지 달릴 때 내 마음은 내가 하지 못한 일들에 집중했었다. 예컨대 나는 한 달에는 최소한 200킬로미터는 달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늘 200킬로미터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 운동하며 이 여름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다. 맥주를 마실 때도 그 생각을 한다. 아무리 거품을 삼켜도 배는 나오지 않으리라. 나는 여름 내내 달렸으니까. 이건 좀 멋지다.

마흔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깨닫는다. 30대에는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어서 달렸다. 그런데 이제는 나 자신과 내 삶과 내가 한 일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때까지 달린다.

- 312~313쪽
김연수 작가의 '지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책 속 '여름 내내 달렸으니 맥주는 얼마든지'라는 글 중에서


달리다 보면 종종 달리는 사람을 마주하게 돼요.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아이러니한 게 그 사람이 나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데 불필요한 신경을 쓰게 된다는 거예요. 앞서게 될 경우에 특히나 그렇죠. 페이스를 간신히 유지하며 달리는 중에도 다른 사람이 툭 앞으로 튀어나와 재빠르게 사라질 때면 갑자기 조바심이 들어요. 그래서 평소 제 역량보다 더 무리하게 되죠. 너무 힘들더라고요.


처음 러닝을 시작한 건 러닝 자체가 좋아서였는데 요즘엔 기록에도 민감해져요. 평소보다 페이스가 줄면 스스로를 탓하는 마음이 불뚝 튀어나오죠. 왜 오늘은 이것밖에 못했을까. 더 빨리 더 오래 뛰고 싶어 안달이 난 마음이 돼요.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무언가에 좇기든 자신을 들들 볶게 되는 걸까요.


안 되겠다 싶어 특단의 조치를 내렸어요. 남이 날 앞서 나가든 오늘 기록이 어떻든 그저 달리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해 보기로 한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게 산뜻해지더라고요. 빠른 페이스를 달리는 멋진 프로 러너를 만나도 주눅이 들지 않았고 매일매일의 기록이 어떻든 그저 오늘 달렸단 사실이 그저 너무나 뿌듯했어요. 러닝을 막 시작했을 때처럼 달리기 자체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 제자리를 찾게 된 거예요.


최근에 F1이란 영화를 봤는데요. 거기에서 브래드 피트가 맡은 주인공도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나 자신 외엔 모두 그저 '소음'일뿐이라고. 확 마음에 와닿았어요. 소음에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도 모르는 새에 결국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어 버리죠. 그 일을 좋아하게 된 이유, 혹은 좋아하는 그 마음과 열정 자체를요.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을 땐 세상의 소리를 모두 음소거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