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굴뚝의 기분
너는 꽃병을 집어 던진다
그것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 삶이라는 듯이
정오
너는 주저앉고
보란 듯이 태양은 타오른다
너는 모든 것이 너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낀다
의자가 놓여 있는 방식
달력의 속도
못 하나를 잘못 박아서 벽 전체가 엉망이 됐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의 늙은 개는 집요하게 벽을 긁고 있다
거긴 아무것도 없어
칼을 깎는 사과는 없어
찌르면 찌르는 대로
도려내면 도려내는 대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얼굴은 빗금투성이가 되겠지
돌이켜보면 주저앉는 것도 지겨워서
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깨어진 꽃병이 가장 찬란했다는 것을 모르고
심장에 기억의 파편이
빼곡히 박힌 줄도 모르고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시집(창비에서 2023년에 발행)
토요일 저녁부터 좀 우울했어요. 출간을 앞두고 있는 책의 프롤로그를 어렵게 쓴 직후부터였던 것 같아요. 긴 시간 공을 들여 써온 책의 앞부분에 수놓아질 문장들이라고 생각하니 쉽지 않더라고요. 거의 3시간을 끙끙 앓으며 썼는데 다 쓰고 나서 문득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허무한 생각이 들었어요.
멍한 상태로 집을 나서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어요. 목적지까지는 1시간 남짓.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을 보니 하나같이 모두 제 화면만을 들여다보고 있더라고요. 저 사람들은 뭘 저리 골똘히 볼까 생각하다가 자연스레 저도 폰을 꺼내 들었어요. 유튜브 창을 내리며 알고리즘이 정해 준 영상 목록을 스르륵 훑어봤어요. AI나 돈에 관련된 영상들로만 빼곡하더라고요. 하나하나 알찬 내용임에는 틀림없는데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어떤 죄책감 때문에 이내 한 영상을 골랐죠. 요즘 주식의 동향이 어떤지 알려주는 영상이었어요.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한참을 웃고 떠드는데 화면 밖의 난 정작 그 내용을 따라가기가 버거웠어요.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왜 항상 무엇을 하고 있어야만 마음이 놓일까요. 정작 하고 있는 중에도 마음에 추를 달아 놓은 듯 버거워하면서 그만두지도 못해요. 결국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게 정말 '사는' 게 맞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