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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너를 만난 지 어느덧 920여 일

by 초희

- 내가 낮잠 자고나서 심심해서 갑자기 쇼핑몰에 갔단 말야. 뭔가 주말에 계속 집에만 있으면 찌뿌둥하잖아. 뭔지 알지? 그래서 갔는데 마침 나이키가 세일을 하더라고. 그래서 러닝복 아래위 세트로 샀어! 잘했지? 근데 위에 거를 연보라가 넘 예뻐서 샀는데 말야. 그게 넘 연보라인 거야. 뭔 말인지 알아? 뛰면 땀이 엄청나잖아. 러닝 다 하고 나니까 팔 아래로 양쪽이 아주 무슨 데칼코마니처럼 똑 닮게 문양이 난 거야. 엄청 웃기지? 그날따라 올라가는데 엘베에 사람이 엄청 많은 거야. 근데 그냥 당당하게 있었어.


석이랑 통화만 하면 주저리주저리 그날 있었던 일을 떠들어댄다. 며칠간은 말을 못 했던 사람처럼. 정말이지 마구마구. 그 애는 내가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 걸 가만 듣고 있다 가끔 ’ 그랬니’라며 은은한 반응을 섞는다. 그럼 난 마치 ‘얼쑤’ 추임새를 들은 소리꾼처럼 신명 나게 이야기를 조잘조잘 이어간다.


그날은 유독 석이의 전화가 반가웠다. 주말이면 우린 꼭 붙어 있곤 하는데 그날은 예외였다. 석이는 1년에 2번 정도 친구들과 계모임을 간다. 간만에 찾아온 홀로만의 시간을 아주 잘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이렇게 각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자고 제안할까도 싶을 정도였는데. 갑작스레 온 반가운 전화에 옥타브를 2에서 3 정도 높여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신나게 쏟아내는 스스로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활 끊고 다시 홀로만의 적막으로 돌아왔다. 나 원래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나, 식탁 위에 나란히 놓인 우리 둘의 사진을 가만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데칼코마니’ 그런 이야길 잘도 했네. 연애 초를 생각하면 엄두도 안 날 그런 이야기를. 문득 서툶만으로 가득했던 설익은 시절들이 스친다. 내 집 코앞까지 와서도 몇 번이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석이. 밥을 먹다가 문득 이야기가 끊기면 애꿎은 손바닥만 줄곧 비비며 수줍어하던 석이. 나의 인류애 상실 레퍼토리가 나오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어쩔 줄을 몰라하던 석이.


만난 지 920여 일이 다 지나고 있는, 농익을 대로 농익은 지금은… 주말이면 서로의 집을 번갈아 드나들며 제 집처럼 머물고, 밥을 먹을 땐 둘 다 식성이 좋아 뭐든 말도 없이 우걱우걱 먹는 바람에 동글동글해진 서로의 배를 가리키며 놀려대고, 종종 튀어나오는 내 타노스 기질에 완벽히 적응해 버린 석이는 이제 콧방귀도 뀌지 않고.


둘 다 혼자를 제일 편하게 여기는 쌉T 중의 쌉T 성향이었는데, 어느 틈에 서로의 벽을 냉큼 허물어 버리게 된 걸까. 그 시작점조차 떠오르지 않을 만큼 요즘엔 서로의 존재가 숨을 쉬는 것마냥 당연해져 버렸다. 내밀함이라곤 도저히 숨길 요량도 없는 좁디좁은 서로의 방 안에서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낸 덕분일까. 틈만 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온시간을 꾹꾹 눌러 담다 보니 우린 어느새 세상에 둘도 없는 데칼코마니가 되어 가고 있었나 보다. 오직 둘만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아주 특별한 데칼코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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