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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

안희연, 면벽의 유령

by 초희
면벽의 유령

여름은 폐허를 번복하는 일에 골몰하였다

며칠째 잘 먹지도 않고
먼 산만 바라보는 늙은 개를 바라보다가

이젠 정말 다르게 살고 싶어
늙은 개를 품에 안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책에서 본 적 있어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기도
빛이 출렁이는 집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은 길을 주었다
길 끝에는 빛으로 가득한 집이 있었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눈부신 집이었다
우리는 한달음에 달려가 입구에 세워진 팻말을 보았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리십시오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늙은 개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버려져야 했다
기껏해야 안팎이 뒤집힌 잠일 뿐이야
저 잠도 칼로 둘러싸여 있어
돌부리를 걷어차면서

다다를 수 없다는 절망도 길을 주었다
우리는 벽 앞으로 되돌아 왔다

아주 잠깐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늙은 개를 쓰다듬으며

나는 흰 벽에 빛이 가득한 창문을 그렸다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시집(창비에서 2023년에 발행)


아주 잠깐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새 삶을 바라고 바라다가 이제야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문턱 앞에 이르렀는데, 끝내 돌아서기로 결심할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아무리 좋은 세상이라 해도 너가 없다면 결국 충만하지 못할 일상이 될 거란 걸 또렷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랑이란 대체 어느 정도의 사랑일까요.

벽에 커다랗게 그린 창문이 비록 실재하지 않더라도 그 허무를 붙잡고 살아낼 용기를 주는 사랑에 모든 걸 걸겠단 마음, 그런 마음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을 모두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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