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이 아니고요?
아닙니다. 적자생존은 백인 상류층의 우월성을 선동했던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와 그의 동료들이 처음 사용했어요. 다윈은 오히려 온화하고 멜랑콜리한 영혼의 소유자였어요. 아픈 고양이를 핥아주는 개, 눈먼 동무에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까마귀 등에 주목했죠.
다윈에게 더 맞는 구호는 '선자생존'입니다. 그는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서 가족과 인류를 넘어 다른 종까지 연민작용을 확대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주장했으니까요.
연민의 양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무엇이죠?
우월감입니다. 내가 특별하다는 우월감은 남들의 슬픔은 물론 자신의 슬픔에도 반응해 주지 못합니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굶고 있는 아이를 봐도 연민의 신경계인 미주신경에 붙지 않아요.
우월감을 통제할 방법이 있나요?
누군가를 만날 때 허리를 굽혀 예의를 표하세요. 타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런 단순한 행동이 미주신경을 활성화합니다. 더불어 자책의 혼잣말을 멈추고 자신에게도 연민을 발휘하세요. 스스로에게 온화할수록 남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 204~205쪽
김지수의 '위대한 대화'라는 책에서 작가 수전 케인과의 인터뷰 중
'적자생존'이라는 말 많이 들어 보셨죠. 진보와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이 다른 개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는 게 생존의 방정식이 되면서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우리 일상에서 불문율로 자리잡게된 것도 같아요. 그런데 그 적자생존이 사실 다윈이 한 말이 아니라네요. 감성적이고 섬세한 성향이었다는 다윈은 오히려 '선자생존'을 외쳤다고요. '적자생존'은 백인 상류층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소수의 욕망에서 비롯된 단어이고요. 그동안 갖고 있던 상식이 뒤집히는 것만 같아 다소 충격적이었어요.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짓는, 나만의 차별성을 세상에 돋보이게 하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인 것 같아요. 그게 '우월감'이라는 다소 거친 방식으로 드러나는 거고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이 우월감이라는 걸, 모두가 지향해야하는 당연한 가치로 생각해 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월'이라는 단어를 한 번 더 해부해 볼까요. 우는 넉넉할 우라는 한자이고, 월은 뛰어넘을 월이라는 한자예요. 타인을 뛰어 넘어 한없이 넉넉해지려는 욕망, 그 욕망을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본성인양 좇아 왔어요.
그 욕망을 좇는 과정 자체도 참 쉽지 않아요. 비교우위에 빠지다 보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자기 만족에 이르는 길을 영영 찾지 못하죠.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할 뿐이에요. 그렇게 정상아닌 정상에 올랐을 땐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주변 사람들을 모조리 밟고 올라서서 결국엔 모든 에너지와 동력을 잃었을 땐 주위에 과연 누가 남아 있을까요.
적자생존보단 선자생존을 마음에 새겨 보자, 책의 문장 덕분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