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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도망치고 싶은 자의 언어

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

by 초희
- 너는 외국어 공부를 즐기니?
나는 확신 없는 투로 답했다.
-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어.
로즈가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어색하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 네가 외국어를 배우는 목적은 뭐야?
나는 고민하다 비교적 솔직하게 답했다.
- 언젠가 이곳을 떠나고 싶어서?
이렇다 할 기술도 자격증도 없는 상태에서 막연히 품은 희망이었다. 나는 정작 가장 중요한 이유인 '외국어 공부를 하다 보면 아직 내게 어떤 가능성과 기회가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를 납골당에 모시고 한달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 226쪽
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 단편소설집 중 '안녕이라 그랬어' 소설 중에서


요즘 자기 전에 영어 회화 앱을 틀어요. 고작 10분 남짓의 시간이지만 시작한 후로는 자칫 빼먹기라도 하면 찝찝함이 마음 저변에서 스멀스멀 올라 오죠. 막 실력이 느는 것 같진 않아요. 우리 말로는 굉장히 단순한 표현들인데 귀와 입에 익게 하기 위해 수없이 반복하고 있을 때면 문득 스스로가 우스워질 때도 있죠.


항상 영어에 부채감이 있었어요. 쉼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일상을 근근히 살아가는 와중에도 잊을만 하면 '아, 영어 공부해야 하는데'라며 푸념하기 일쑤였죠. 그 이유가 무얼까 생각했는데 소설 속 문장에서 답을 찾았네요.


외국어를 공부하면 '여직 나에게도 어떠한 일말의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이 있다'라는 걸 시사해 주는 것 같아 그동안 놓지 못하고 있었나 봐요. 현실은 간단한 일상 회화조차 간신히 반복해 따라하고 있으면서, 참 꿈도 크죠. 하지만 7평 남짓한 방에서 낯선 이국의 말을 홀로 읊조리다 보면 희뿌연 희망의 끄트머리를 계속해서 보게 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요. 대체 난 어디로부터 어디로 도망치고 싶은 걸까요.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조그만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얼마간 빠져들겠죠.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어쩌면 생의 어느 구간에서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유한하고 유한한 그 희망 속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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