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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우울을 감미롭게 한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초희
그의 음식 값을 치르고 레스토랑을 나와서 더욱더 감미로워지는 우울에 빠져 거리를 산책했다. 테레자와 함께 산 칠 년이라는 세월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 시절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통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토요일 저녁이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혼자 취리히 거리를 산책했고 자유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거리 모퉁이마다 연애 가능성이 널려 있었다. 미래는 다시 하나의 신비로 되돌아갔다. 그는 오로지 독신으로만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으니 자신의 운명은 그런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던 삶, 독신자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는 테레자에게 얽매여 칠 년을 살았고, 그녀는 그의 발길 하나하나를 감시했다. 마치 그의 발목에 방울을 채워 놓은 것 같았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갑자기 훨씬 가벼워졌다. 거의 날아갈 듯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마술적 공간 속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

- 54쪽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 중


첫사랑과 이별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가슴에 추를 단 듯 늘 마음이 무거웠고, 가만히 있기가 두려워 이곳저곳 쏘다니기 바빴던 기억이 있어요. 헤어지고 첫 주는 거의 제정신으로 살질 못했죠. 밥을 뜨던 숟가락을 끝내 내려놓아버리거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넋 놓고 있다가 귓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얘기 같아 결국 엉엉 울어버리기도 했어요. 그 길로 집에 와선 그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다이어리마저 들춰보기가 무서워 쓰레기통에 처박기도 했죠. 스무 살의 시간들이 온전히 실린 그 소중하고 소중한 기록들을요.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니 일상에 내려앉은 우울이 호흡하는 공기처럼 익숙해지더라고요. 소설 속 문장같이 우울이 '감미롭다'라고 여겨질 정도였죠. 진부한 일상을 수놓아 주는 데코라며, 차라리 추억할 슬픔이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기까지 했어요. '달콤 쌉싸름'한 과거 속을 한동한 헤매다 보면 이름 모를 어떤 만족감마저 느껴졌달까요. 그와 머물러 있던 과거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할 때면 나만의 스테디셀러 영화를 가지게 된 것만 같은 특별한 생각에 부풀어 올랐어요.


한 시절을 그렇게 어딘가에 매어 놓고 나니, 참 후련해지더라고요. 누굴 만나 무얼 하든 오롯이 자유라는 해방감에 가슴 한 켠이 뻥 뚫린 것만 같았죠. 그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이 어느새 권태가 되어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다시 되돌아오기 전까지는요. 그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만큼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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