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생 경순 씨와의 이야기
그날은 날이 맑았다. 투명한 햇빛 사이로 푸른 잎들이 제 존재를 유난스레 빛내던 날. 짐을 싸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한순간의 소식으로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경순 씨는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제 어떡하니, 맥없이 흘러나오는 신음 앞에 나 역시 대답할 말을 잃었다. 그저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그래서 박차고 나온 참이었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 손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오래전에 산 묵주 팔찌였다. 느슨해진 줄을 따라 늘어선 나무 돌들을 손가락으로 비집고 짚어 내며 한동안 시간을 때웠다. 그러게, 어떻게 사냐. 그 짧은 찰나에 아마도 기도를 했던 것 같다. 도와주세요. 정말로 그 위에 계시다면 이러시면 안 돼요. 이제 그만 좀 해 주세요.
아스팔트 위로 일렁이는 풍경을 바라보는데 뭔가가 안에서 솟구쳤다. 성큼 다시 집으로 걸어가 넋이 나간 경순 씨를 다시 마주했다. 엄마, 괜찮아. 어떻게든 하면 돼. 쇳소리를 내곤 이삿짐을 옮기는 인부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옷 한무데기를 포장하는 것이었다. 갖은 알바를 하며 간간히 사온 나름 예쁘다 여긴 그 실뭉치들. 이제 혜준이 대학 들어가는데 옷 없으면 안 되잖아. 잠깐 동안만 힘들면 돼. 우리 지금 죽은 거 아니잖아.
그렇게 이삿짐센터에 기정 없는 세월 동안 맡기게 될 짐들을 한참 추리는데 경순 씨가 잠시 어딜 가자했다. 그 옆엔 깡마른 락순 씨가 그의 팔을 동여매고 있었다. 무엇을 타고 어떻게 이동했는진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동사무소를 나오던 경순 씨의 빨간 눈. 계속, 계속 엄마 고마워하던 유난히 흔들렸던 목소리뿐. 경순 씨는 참은 울음을 기어이 터뜨릴 때면 항상 눈이며 얼굴이며 온통 붉게 물들이곤 했다.
락순 씨가 수년에 걸쳐 잡초를 뽑으며 모은 돈으로 우리는 간신히 살아갈 터를 되찾았다. 잔금을 치른 후 마침내 들어가게 된 새로운 월셋집에서 짐을 정리하며 나 역시도 연신 속으로 감사하다 되뇌었던 것 같다. 하늘 언저리에 있겠거니 한동안 굳건히 믿었던 그 존재에게. 이제는 교회 진짜 열심히 다닐게요, 라며. 유난스레 빨리 저문 하루를 뒤로한 채 낯설고도 컴컴한 방 안에 경순 씨와 나란히 누웠다.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면서 고단한 몸을 이리저리 뒤채이다가, 눈을 질끈 감은 경순 씨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경순 씨는 늙은 어미에게 기어코 지게 된 빚을 못 참아했다. 평생을 주부로 살아온 그가 해낼 수 있는 일이란 얼마 없었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 끝내 정착하게 된 곳은 기다란 가래떡으로 만든 떡볶이를 파는 분식집이었다. 상가 문 앞에 바로 자리한 그곳은 1년 내내 덥거나 추웠다. 늘상 구슬땀을 흘리거나 오들오들 떨며 일하던 경순 씨가 동경했던 건 분식집 맞은편에 있는 홈플러스였다. 두꺼운 유리문 안에 온존한 계산대에서 일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경순 씨는 한참을 애달파했다.
그러던 경순 씨는 끝내 홈플러스 계산원이 되었다. 4년 하고도 2년, 대학을 다니던 내내 난 일하는 경순 씨를 보러 수시로 그곳에 들렀다. 길게 늘어진 사람들 뒤로 몰래 서서 멀찍이 경순 씨를 지켜봤다. 봉지 필요하세요? 포인트 있으신가요? 꽤나 노련해진 말씨로 낯선 이들에게 이것저것 묻는 경순 씨가 귀엽기도, 애처롭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 차례가 되어 깜짝 놀래켜 주면 경순 씨는 늘 처음인 것처럼 뭐야, 어처구니없어했다. 볼 한쪽을 씰룩이며 쑥스럽게 웃다가 얼른 먼저 가라며 항상 손사래를 쳤다.
문제의 그 월셋집에선 2년을 꼭 채워 살았다. 그 뒤로 하나, 둘, 아마도 셋의 월셋집을 2년 터울로 연이어 옮겨 다닌 것 같다. 홈플러스 근방에 있는 아파트란 아파트는 다 살아볼 것처럼. 그렇게 삶의 터전은 늘상 비슷하면서도 바뀌었지만, 경순 씨의 일터는 꾸준히 그곳에 있었다. 무려 13년 동안이나 경순 씨는 그곳에서 한결같이 일했다. 작은 몸에 당찬 목소리로 봉지가 필요하냐, 포인트가 있냐 물으며.
내가 뭐 하기로 정하면 꾸준한 거 하나는 기가 막히잖아. 엄마 닮아서 그런가 봐. 가끔 경순 씨의 오랜 근속 년수를 멋진 말로 치켜세워 줄 때면 경순 씨는 표 나게 좋아했다. 그치, 내가 끈기 하나는 대단하지. 가끔 경순 씨는 무엇이든 될 수 있던 시절을 돌이켜보며 자못 아쉬워하기도 했다. 내가 너 나이였을 때 일을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땐 사회생활이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몰라. 그러면 난 복잡한 심정이 되곤 했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내조한다는 게 어린 경순 씨에겐 수순 같은 선택지였을 테니까. 아니, 그 외 다른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이 당시 경순 씨에겐 애초에 없었을 지도.
경순 씨의 턱 주위엔 그 시절의 상흔이 역력했다. 어느 날 경순 씨는 하루 걸러 하루, 거의 매일을 날뛰던 친부 앞에 용감히 뛰어들었다. 락순 씨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손찌검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그러다 칼부림이 났었나, 몰라. 이거 칼에 스친 걸걸? 덤덤히 말하는 경순 씨 앞에서 난 영영 닿을 수 없을 그의 한 시절을 애써 떠올려보곤 했다. 아직 나를 품지 않았던, 누구도 품을 수 있었던, 혹은 그 누구도 품지 않아도 되었던 적막한 자궁을 가진 경순 씨의 모습을.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마침내 내가 그 오랜 둥지를 떠나게 됐을 때도 경순 씨는 어김없이 그곳에 남아 바코드를 찍었다. 몸은 멀어졌지만 마음엔 늘 경순 씨가 살았다. 마트에 갈 때면 손목이 안 좋아진 경순 씨를 떠올리며 계산원들의 일을 거들기도 하고, 유난한 옥타브로 밝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숱하게 지나온 불행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기워 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가끔은 무구한 세상 앞에 무너지기도 했다. 말간 얼굴로 사정없이 마음을 할퀴는 사람들. 순진과 순수 그 어느 중간쯤에 선 그들과의 대화에선 종종 맞설 말들을 잃었다. 그냥 열심히 살지 않은 거예요. 마음먹기 나름이죠. 저도 어려울 때가 있었어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위로 향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니, 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에게 그들은 언제나 말끔한 노력의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그런가. 나와 경순 씨는 다만 열심히 살지 못한 걸까. 이야기의 마지막 단계에선 화가 나버리는 건 언제나 내 쪽이라 늘 멋이 없게 끝나버리곤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성을 내 버리게 되면 뻘쭘해진 공기 속에 홀로만 죄인이 된 것 같아 못내 쭈뼛거리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럴 때면 그냥 스스로의 존재가 한없이 미워졌다.
분풀이의 대상은 늘 경순 씨였다. 엄마는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어. 경순 씨는 모르는 내 일상 속에서 묵혀 온 말들이 사무치는 비수가 되어 내리 꽂힐 때 그의 눈은 다시 빨개졌다. 그러면 난 또 죄인이 되었다. 경순 씨는 영영 모를 세상과 나만 아는 경순 씨의 세상의 경계선에서 끝없이 부유할 수밖에 없는 내 생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그렇게 경순 씨와는 종종 세상이 붙이는 싸움을 했다.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을 쏟아내며 한껏 부딪힌 후 우리는 닮아 있는 각자의 얼굴을 노려보며 씩씩 숨을 몰아 쉬었다. 다행스럽게도 화해는 늘 빨랐다. 경순 씨에게 미안함을 표하는 나만의 방식은 스타벅스 쿠폰을 보내 주는 거였다. 엄마, 이거 먹고 오늘도 힘내서 일해. 응, 고맙다. 틀에 박힌 듯 전국 어디에나 널려 있는 그 카페를, 경순 씨는 항상 좋아라 했다. 세상이 정해 놓은 좁은 틀 안에서도 늘 행복과 보람을 찾을 줄 아는 귀인답게.
경순 씨와 지내온 20여 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가끔 생각해 본다. 우리는 세상이 흩뿌려 놓은 저기 저 수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모래사장 속 낱알보다도 한참 못 미치는 존재일 수 있겠지만. 무수한 존재 속에서 오직 서로만이 옹기종기 얽히고설키게 된 이유를 사랑으로 풀어보려 애쓰며 간신히 의미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일 수 있겠다고.
우리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끝내 우리말곤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 글의 제목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2005년작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 따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