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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청년, 남의 아들 이야기 일까?

by 레이지마마

지난 6월 대통령 선거를 하러 제주에 온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대부분의 학교 친구들이 특정 후보를 욕하고 조롱하는 발언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그런 것 같냐고 물으니, 다들 깊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 것 같고 친구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서로 서로 휩쓸리는 것 같다고 했다. 아들은 대학 축구부에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으로 보내고, 정치나 사회 이슈 등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는 축의 학생들이다.


최근 10대, 20대 남성들의 보수, 극우화가 점점 심해진다는 기사를 여기저기서 봤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던 중 프레시안의 기사의 한 문장에 눈길이 갔다.


20대 남성 3명 중 1명이 권위주의·반이민주의 등 극우 성향을 보인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5명 중 1명꼴인 20대 여성 극우 비율보다 50% 높은 수치다. 30대 또한 극우 남성 비율이 여성 대비 2배 높았다. 30대의 경우 가족과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으면 극우 성향이 완화돼, 특정 성향 강화에 사회적 고립과 제한된 교류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 프레시안 2025년 5월 29일 보도 http://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52911404549320


특정 성향 강화에 사회적 고립과 제한된 교류가 영향을 미치는데, 그 경향이 여성보다 남성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곧,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사회적 교류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뜻이 될 수도 있을까?



남자아이들은 왜 더 높은 비율로 '문제아'가 될까?


나는 두 아들을 키운 엄마다. 13년간 레이지마마를 운영하며 수많은 부모와 아이들을 가까이서 보아온 관찰자이기도 하다.


딸 엄마들에 비해, 아들 엄마들은 유독 주변에 사과할 일이 많다. 남자아이들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아이 나름이라고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활동량이 많고, 무모한 도전을 좋아하고,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하다 보니 뛰어가다 친구를 밀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왈칵 끼어들어 어른들의 말을 끊는 일도 잦다.


아들 엄마들이 그러려니 하는 일들도, 딸 가진 엄마들은 이해 못 하는 일들이 있다. 서로의 신발을 밟고 논다든지, 갑자기 레슬링을 한다든지, 코딱지를 파서 튕긴다든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 상대방의 화를 돋운다든지…. 남자애들은 뭔가 덜떨어져 보이는 이상한 행동 들을 종종 한다. 잘 흥분하고 툭하면 싸우고,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쉽게 다시 논다. 그 과정에 정식적인 화해나 상황 설명 등은 필요 없다. 그렇기에 남자들만 모여있는 세계에선 폭력적인 행동, 민폐를 가르는 기준선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여자애들과 함께 놀 때 그렇게 행동하면 문제가 된다. 폭력적이고 피해를 주고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는... 상대방에 따라 가해자로 취급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아들 엄마들은 딸 엄마들에게 머리를 조아릴 일이 많다. 그리고, 아들을 딸처럼 교육하기 시작한다. '이상적인 행동'의 기준이 여아의 평균적 특성에 맞춰있기 때문에, 이 사회의 바람직한 구성원이 되려면 아들들은 더 자주 혼나고, 제지 당하고, 잔소리를 들으며 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더 많이 혼나는 상황은 유아기를 지나, 학생이 되면서도 이어진다.



학교는 '조용히, 오래 앉아 있는 아이'를 선호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준비물을 가져다주러 갔다가 교실을 살짝 들여다본 일이 있다. 몸을 배배 꼬고, 다리를 떨고, 지우개 조각을 던지거나 딴짓을 하는 아이들은 어느 교실에나 있는데, 대개는 남자아이들이었다.


한국의 학교는 긴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글을 읽고, 지시에 따라 과제를 수행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그렇다 보니, 활동량이 많거나 주의 집중 시간이 짧은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지적받거나 혼날 가능성이 높다. 칭찬받는 어린이가 되려면, 얌전히 오래 앉아 책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글을 반듯하게 쓰고, 말을 또박 또박 잘해야 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서 요령 있게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아무래도 몸을 더 많이 움직이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한 가지에 꽂히면 귀가 잘 안 들리는 경향이 있기에... 수많은 지적을 받게 된다.


남학생에게 불리한 건 행동 성향뿐만이 아니다.


글을 읽는 능력 또한 여학생들이 더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PISA 2022)에 따르면, OECD 국가 전체에서 여학생의 읽기 점수가 남학생보다 평균 24점 높았고, 한국에서도 여학생 526점, 남학생 503점으로 20점 이상의 차이가 나타났다. (출처: OECD PISA 2022 Results (Volume I), 2023 ; 이인화, 2020 「우리나라 학생들의 PISA 2018 읽기 성취 특성 연구」)


읽기 능력은 단순히 국어 점수를 넘어 모든 과목의 기반이 된다. 읽기 능력이 낮으면 교사의 설명 이해도, 문제 해결력, 심지어 사회생활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읽기 격차는 ‘학업 성취 격차’이자, '자기표현의 격차'가 된다. 이는 소통의 어려움, 표현할 길 없는 억울함으로 이어진다는 게 내 추측이다.


실제로 내 주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버지를 받들어 모시던 가부장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가정 내 권력은 말발이 센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말발이 센 사람은 물론 엄마들이다. 아빠는 엄마를 말로 이기기 어렵다. 고작 할 수 있는 건 화를 내고 뛰쳐나가는 것인데, 카드 사용 내역도 모조리 감시당하고 있어 일탈 행동도 어려워졌다. 남자들은 큰 소리를 버럭 치거나, 문을 쾅 닫았다는 이유로 또 한 번 가해자가 된다. 그래서 내내 눈치를 본다. 욕먹지 않으려고, 일을 키우지 않으려고...... 그런 가정에서 아빠의 행동 양상은 회피와 수동적 태도로 나타난다. '어차피 지 맘대로 할 거면서...'라는 마음이 저변에 깔리며, 시키는 일이나 하고 슬슬 도망 다니기 시작한다. 그런 태도는 부인의 화를 더욱 돋우고, 부부 싸움의 또 다른 실마리가 된다. 그래서 남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니, 나 더러 어쩌라고?"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 세계도 이와 비슷하다. 남아와 여아가 싸우면, 전후 사정을 막론하고 남자아이가 혼날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여자 아이들은 6~7세쯤 되면 남아들에 비해 말발이 월등히 세진다. 남자 아이들이 어버버 하고 있는 사이, 여자 아이들은 재빠르게 전후 사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하여 설명한다. 남자 아이들은 뭔가 억울한 것 같은 데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쟤가 먼저 그랬다고오오오오오~~~"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오오오오~~~" 라고 땅을 구르며 악다구니를 쓰다가, 결국 엄마에게 더 혼난다.



'문제아'라는 낙인


미국 교육부의 Civil Rights Data Collection (2021)에 따르면, 남학생은 전체 공립학교 학생의 약 51 %를 차지하지만, 정학 · 퇴학 등 징계를 받는 비율은 전체의 68%에 달한다. 수치만 보면 남자아이들이 훨씬 더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존재'처럼 보인다. 실제로 남학생들이 활동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더 많이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그래서 징계를 더 많이 받는 것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관찰해 온 나로서는 교사들의 편향 (무의식적인 판단)이 징계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실제로 "같은 행동이라도 남학생에게 더 부정적으로 해석된다."라는 연구 결과가 다수 있다. 예컨대,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여학생을 "친화력이 좋고 사회성이 있다"라고 평가한 교사가 많은 반면, 같은 행동을 한 남학생은 "산만하다." "통제력이 부족하다."라고 평가한 사례 등이 있다. (Skiba et al., 2014; Morris & Perry, 2017 / https://academic.oup.com/socpro/article-abstract/63/1/68/1844875? login=false)


이 현상은 한국에서도 비슷하다. 교육 심리 연구에서는 남학생이 교사와의 관계에서 더 자주 “지시형 피드백”을 받고, 여학생은 “격려형 피드백”을 받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보고된다.

(출처 자료 : 2019 「초등 교사의 성별 편향적 상호작용 연구」, 한국 교육 심리 학회)


"문제아"라는 낙인은 종종 실제 행동보다 평가의 방식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몸으로 부딪치며 터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한 남자아이가, 타고난 기질이나 행동을 끊임없이 간섭받고, 지적받고, 혼나며 자란다면 그 아이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될까? 어릴 땐 그나마 엄마나 교사 앞에서만이라도 말을 잘 듣는 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존중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에, 그것이 충족되지 못한 상태에서 사춘기를 맞으면 부모와 (또는 학교 등 나를 문제시한 사회의 구성원들과) 멀어지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존중받지 못 한 정체감은 두려움을 불러온다. 그 두려움은 분노, 원망, 도피, 무기력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는 주류가 아니다." 소외감이 만든 새로운 흐름


지나친 논리적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요즘 한국 사회에서 드러나는 청년 극우화와 그들의 배타적 세계관이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혼나는 쪽에 서며, 학교와 사회로부터 “나는 문제아”라는 메시지를 받은 경험이, 성인기의 여러가지 불안요인 (취업과 연애의 어려움, 안전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커뮤니티의 부재 등) 과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나는 이 시스템의 일부가 아니다.'라는 소외감, '나만 피해 본다’라는 피해의식 등으로 이어지는 건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가설 아닐까?


정치학자들은 이 현상을 '상징적 박탈감'이라 부른다.


상대적 박탈감이 '타인과 비교해 느끼는 불공정함'이라면, 상징적 박탈감은 '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말한다. 이 느낌이 어린 시절부터 누적되면 피해의식에 절은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


피해 의식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부당하고 억울해 보인다. 군대도 안 가면서, 잘났다고 설쳐대는 여자들이 꼴 보기 싫어지고, 민주주의다 복지다 잘난 척하는 것들도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차라리 나의 분노에 동조하고, 편들어주고, 낄낄거리며 비뚤어진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는 커뮤니티가 더 내 편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런 상태에 놓인 사람에겐 논리적인 설득보다, 감정적인 선동이 훨씬 잘 먹힌다.


우리는 골방에 앉아 일베나 에펨 코리아에 모여 조롱과 혐오를 일삼는 청년들을 '괴물'이라 칭한다. 내 아들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지금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보이는 우리의 아들들이 정말 건강한 마음으로 자라고 있는가?


이들의 행동을 보면 나도 화가 난다. 재난을 당한 유가족을 조롱하던 그들을 생각하면, 싹다 잡아들여 빳다라도 한대씩 치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딱하다. 그들의 병든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알고 싶고, 치유할 방법을 찾고 싶다. 그들은 결국 내 아들들이고, 내 아들의 친구들이고, 내 딸이 함께 살아야 할 남편이자, 누군가의 아버지가 될 것이기에... 마냥 모른 척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서로를 돌보는 마음, 다정함이 결국 세상을 구원한다.


2025. 10. 26.

리즈


* 챗지피티에게 이 글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라고 지시한 결과,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행동 양상에 대한 묘사 부분 (덜 떨어진 행동을 하는 남자 아이들, 자기에게 유리하게 편집해서 상황을 전달하는 여자 아이들 등)이 젠더 담론에서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의견을 주었다.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누군가는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남녀를 이분법적으로 그린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차이를 논의하기 전에 경계만 긋는다면, 이야기는 더 이상 현실로 나아가지 못한다.


나는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다.'라고 단정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아이들을 지켜 본 한 엄마이자 관찰자로서, '누가 더 자주 지적받고, 누가 더 쉽게 인정 받는가.'라는 현실의 상황을 솔직히 드러내고 싶었다. 그래서 AI 의 훌륭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 문장들을 남겨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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