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월요일이란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거부 투쟁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요 며칠 마음이 썩 좋지 않다.
6월이 시작되면서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의 복직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고,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까지는 10시에 등원, 11시에 하원을 한다. 첫 주는 내가 함께 어린이집에 머물렀으므로 아주 경쾌한 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둘째 주, 그러니까 지난주부터 아이는 20개월 인생 처음으로 한 시간 동안 엄마 아빠, 둘 모두와 떨어지는 생이별을 매일 경험했다. 아이는 싫어하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월요일보다 화요일에, 화요일보다 수요일에, 수요일보다 목요일에 더 크게 울고, 더 강한 몸짓으로 등원을 거부했다. 그곳이 엄마, 아빠와 함께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에.
11시에 데리러 가면 나를 보고 울음을 그치긴 했으나, 머리카락은 땀으로 흥건하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으며, 여전히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최대한 담담하고 기쁜 얼굴로 아이를 맞이하려 애썼지만, 마음이 쓰린 것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더 조그맣게 보였다. 한 시간의 울음만큼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한 시간을 아직은 나를 위해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르고 달래서 어찌어찌 어린이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터덜터덜 집에 홀로 돌아오면 심장이 고유의 규칙성을 잃고 제멋대로 뛰었다. 이럴 땐 급히 인스턴트커피를 타 마신다. 이런 심장에 커피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커피가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길 바라면서. 커피에 얼음을 잔뜩 넣어 후루룩 마시고 집안일을 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쓰레기를 버리고, 이불 빨래를 돌리고, 에어컨 필터를 씻고, 청소기를 돌리고, 점심을 준비했다.
오늘의 심장은 지난주보다는 안정적이다. 하지만 편해진 건 아니다. 조금 익숙해진 것일 뿐.
오늘도 11시, 아니 10시 59분에 어린이집 초인종을 눌렀다. 지난 금요일부터 울음은 조금 잦아들었다고 했지만, 주말을 지나고 새로 맞는 월요일은 그 경향성을 뒤집기에 충분한 날이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여러 감정이 스민다. 오늘의 한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문 가까이 귀를 대보았는데 다행히 울음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어린이집 현관이 열리고 아이가 맨발로 달려 나왔다. 얼굴에 울음기가 없다. 비교적 평온해 보인다. 휴. 몰래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이 오른손에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 토끼풀 한 가닥이 들려 있다. 등원 길에 화단에서 꺾어준 것인데, 한 시간 내내 꼭 쥐고 있었던 것 같다. 완전히 시들기 전에 반드시 엄마가 올 거라는 약속을 이해했다는 듯이. 내일은 좋아하는 인형을 들려 보내야겠다.
가족이 되어 함께하려고 아이를 낳았지만, 어쩐지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상실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상실감. 김광석의 노래는 서른 즈음에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훨씬 일찍부터 이별은 시작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