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행위가 지극히 의무적 행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식사 시간의 1차 목적은 나의 '먹음'이 아니라 아이를 '먹임'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먹임'이라는 행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음식을 적당하게 하기(아이가 먹기에 적당한 크기, 당도, 염도, 온도가 되도록 자르고, 맹물에 씻어내고, 입으로 후후 부는 행위 등), 골고루 먹도록 유도하기(잘 먹지 않는 반찬에 관심을 가지도록 포크로 찍어본다든지, 과장된 몸짓으로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행위 등), 잘 먹는 모습을 칭찬하기, 바른 식사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기(도구나 컵 등을 식탁 위에 안정적으로 놓을 수 있게 알려주기, 후루룩 삼켜버리지 말고 꼭꼭 씹으라고 이빨을 보여주며 딱딱거리기, 식사 시간 중에 후식의 위치는 어디인지를 알려주기 등) 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 먹임이라는 돌봄 노동은 아주 바쁘고 정신이 없다. 나는 아이가 6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아이 주도 이유식'을 표방해 와서 그런지 아이가 식사를 하면서 식사 공간을 어지르거나 지저분하게 만들어도 어느 정도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견딜 수 있다. 그러나 현재 16개월이 된 아이는 점점 더 놀랍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어질러준다. 와우. 말려야 하나 그저 지켜보아야 하나 매 순간 줄타기를 하는 와중에 나도 먹어야 한다. 그래야 식탁 및 주변 정리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다음 끼니는 무엇으로 해결할까 생각도 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니까. 먹임 행위와 '동시에' 혹은 먹임 행위들 '사이에' 이따금씩 발생하는 틈바구니에 나의 먹음 행위를 다급하게 밀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먹음 행위에는 음식의 향, 온도, 빛깔을 향유하기, 나의 몫으로 부여된 음식을 바라봄으로써 미리 충만함을 감각하기, 씹고 혀를 굴려 맛을 음미하기, 밥 한 숟가락과 가장 조화로운 반찬 조합의 생성을 위해 이리저리 실험하기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행위의 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에서 먹음 행위의 즐거움은 극대화된다. 하지만 최근 몇 달의 식사에서는 이와 같은 먹음 행위에 나의 의식을 소요하는 것이 매우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사실 먹음을 충분히 향유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은 아이가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상쇄가 된다. 현재의 다급한 문제는 소화 기관이 느끼는 부담이 만성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소장의 융털에 시멘트를 부어놓은 듯 소화 과정이 답답하고 딱딱하다. 배에 힘을 풀면 소화기관들이 꿀렁거리다 입으로 탈출을 시도할 것만 같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좀 더 자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일까,라고 생각해 보아도 매일이 더부룩하므로 당장의 습관을 바꾸는데 의지를 조금 내보기로 한다. 나의 '먹음' 행위에 좀 더 시간과 정성을 써 주기, 이를테면 좀 더 오래 씹기. 같은 것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