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굴드의 의자

by 힉엣눙크

10여 년 넘게 사용하던 의자가 고장 났다. 의자의 높이가 자꾸 낮아져서 확인해 보니 높낮이 조절 레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그 부품만 따로 파는 것 같지 않아서 수리는 안 될 것 같고 새로 구입해야 할 듯싶었다.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의자이고 또 외관은 멀쩡한 데다 높이 이외에는 별문제도 없어서 지금은 그냥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정 불편하다 여겨지면 그때 교체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의자가 낮아지자 책상은 높아졌다. 마치 키 작은 아이가 된 것처럼.


앨범을 펼쳤다. 오래전 찍은 사진 속에서 아내가 활짝 웃고 있다. 자신의 체형에 비해 훨씬 작은 의자에 앉아서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소녀처럼. 밀양 표충사 계곡 어느 전통찻집 앞마당에 놓여 있던,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국민학교 저학년용 나무의자였다. 너무 앙증맞고 작아서 방문자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앉아보곤 하는 것이었다. 내가 요렇게 작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삶이 이처럼 신비스럽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 말이다.


어리거나, 힘이 없거나, 약하거나, 작으면 무시당하기 쉬운 것이 세상의 생리다. 그래서 키가 작은 아이는 병원에 데려가 성장주사를 맞히고 어른들은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키높이 구두를 신거나 명품으로 치장한다. 남들에게 꿀리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때로는 더 건강하고, 보다 돋보이며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우리는 크고 작은 외형적 꾸밈에 노력을 기울인다. 그것도 또한 세상의 생리이다. 하지만 스스로는 안다. 외형을 가꿔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그처럼 커지거나 아름다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외면에 집착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할수록 내면은 마치 속이 텅 빈 공갈빵처럼 공허해짐을 우리는 느낀다.


캐나다 토론토 출신 음악가. 바흐에 능통한 거장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글렌 굴드는 결벽증과 건강염려증 그리고 정신질환을 평생 갖고 살았다. 감염 우려로 타인과의 악수를 꺼렸고 한여름에도 외투와 모자, 목도리를 하고 장갑까지 끼고 다녔으며, 연주 시작 전에는 피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에 20분간 손을 담그는 의식을 고집했다. 연주를 할 때면 춤을 추듯 온몸을 흔들고 지휘를 하고 콧노래도 흥얼거린 괴짜 피아니스트였다.


굴드가 10살 무렵 보트를 타다가 허리를 다치자 그의 아버지가 의자의 다리를 잘라서 높이를 낮춘 접의자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는 평생 그 의자를 들고 다니며 연주했다고 한다. 마치 초등학생용인 것처럼 낮은 그 의자에 앉아서 피아노를 연주하다 보니 코가 건반에 닿을 듯했고, 손가락은 아래로 두드리기보다는 끌어내리듯 타건했다. 나중에는 의자의 쿠션이 닳아 없어져서 엉덩이를 나무틀에 걸치듯 앉아야만 했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교체는커녕 수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미관이나 편안함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높이와 느낌만을 원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그 낡은 의자만이 자신의 연주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 괴짜 피아니스트의 의자는 지금 ‘캐나다 국립예술센터’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가 녹음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긴 여운처럼 그 의자가 오래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일종의 기시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10살 혹은 사춘기 시절에 성장이 멈춰버린 조그마한 자아를 고치지도 버리지도 바꾸지도 못하고 한평생 지니고 다니는 우리들의 모습. 그 작은 영혼이 나의 본질이라고 강하게 집착하는 내면의 자화상이 ‘굴드의 의자’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불변의 영혼이 나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다고 여기며 그 실체성에 집착한 채 수리도 수선도 개조도 성장도 하지 않는 우리의 초상이 어쩌면 ‘굴드의 의자’를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나 보였는지도 모른다. 작고 초라하고 낡은 그의 접이식 의자를 쳐다보며 느끼는 기이하고 측은하고 애잔한 그 마음은 ‘굴드’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투성이의 외롭고 작은 영혼을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허리 아픈 어머니의 말씀이 시가 된 이정록 시인의 <의자>의 일부이다. 어린 자녀는 부모에게, 노부모는 자식에게, 학생은 스승에게, 환자는 의사에게, 친구는 친구에게 그렇게 우리는 서로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의자가 된다. 휴식과 위안과 용기와 희망이라는 의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나는 관계망 속에서 옹졸한 자존심, 협량한 자아를 ‘굴드의 의자’처럼 고집스레 부여잡고 평생을 살아왔다. 내면의 작은 소년을 감싸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북돋워주기보다는 책망하고 야단치고 비하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이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햇살 따스한 5월의 오솔길을 함께 거닐어 본다. 과거의 모든 잘못과 부끄러움을 거두고 이제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 자신을 보다 사랑해야겠다 다짐해 본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고 했던 알베르 카뮈의 말을 되뇌면서 저울과 계산기는 내려놓고 나무 그늘에 턱 하니 내 의자 하나쯤 내놓으련다.


10여 년을 사용하고 고장 나 버린 나의 의자는 이제 바꾸어야겠다. 나쁜 자세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불편함이 당연하다 여겨지지 않도록, 약하고,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어리석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도록, 그래서 아내에게 또 누군가에게 튼튼하고 편안한 의자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외국인의 순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