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
비가 그쳤다. 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끝나고 쏟아져 나온 아이들.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파랗게 드러난 하늘과 맑은 햇빛, 조잘거림과 웃음소리, 골목길을 돌아들 때마다 외치는 그리운 이름 이름들. 이윽고 혼자 걷는 비포장길은 군데군데 빗물이 고여 조그만 웅덩이들을 이루고 있었다. 크고 작은 거울들이 바닥에 생겼다. 씽크홀처럼 땅 밑으로 시퍼런 하늘이 끝 모를 듯 깊이깊이 내려앉아 있었다. 잘못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까마득한 지하의 하늘로 곤두박질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불현듯 들었다. 얕은 물, 거울에 비친 허상임을 알고 있었지만 무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장화를 신었음에도 비 고인 웅덩이를 슬며시 피해서 걸었다. 살면서 마주하는 걱정들은 고인 물과 비슷했다.
유리구슬
좌르륵 거리는 소리, 투명한 유리알, 알록달록 박제된 무늬들. 친구들과 구슬치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동그라미 안에 누가 가장 가까이 구슬을 던져 넣는지 겨루는 내기. 이미 자리 잡은 구슬을 ‘딱’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맞혀서 밀쳐낼 때면 터지는 환호성. 나의 구슬은 너의 구슬이 되고 너의 구슬은 또 언젠가는 나의 구슬이 되었다. 엄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으로 힘껏 겨눠 튕기면 힘차게 날아가는 유리구슬. 이번에는 맞힌다 반드시. 입술을 앙다물고 구슬에 눈을 바짝 갖다 대면 어렴풋이 보이던 뒤집힌 하늘과 땅, 짜부라지고 홀쭉해져서 거꾸로 서 있는 친구들. 저녁밥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외침에 뛰어서 집으로 돌아갈 때 호주머니에서 잘그락거리던 유리구슬. 옛 생각에 슬며시 호주머니를 뒤지면 만져지는 자동차 키. 구슬 속에 거꾸로 서 있던 아이들은 이제 어디로 사라졌나?
금속거울
가장 오래된 거울은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의 고대 무덤에서 발견된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거울이라고 한다. 8,000여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그 옛날 돌을 깨고 갈아서 거울을 만들어낸 선인들의 지혜와 집념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은 모습과 세상은 무엇이었나? 이후 구리나 청동 등 금속으로 만든 거울을 거쳐 오늘날의 유리 거울로 일반화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유리 거울도 유리의 이면에 수은이나 은, 혹은 알루미늄을 코팅한 것이므로 사실상 금속거울이라는 것이다. 유리는 빛을 반사하는 얇은 금속막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기능만 할 뿐이다. 귀금속 같던 거울이 이제는 흔하고 싼 잡화가 되었다. 세상은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훨씬 커져버렸다.
두려움
다른 세상으로 연결되는 창문, 같은 세상이지만 좌우가 뒤바뀐 세상, 소리 없이 고요한 세상, 거울 속 세상은 빛나는 그림자이자 건너갈 수 없는 경계이다. 오래전 거울은 고귀한 물건, 세상과 나를 비추는 영매였다. 고대사회에서 거울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왕이나 제사장, 무당이었고, 오늘날에도 거울은 무당이나 주술사들의 무구 중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그래서일까 종종 영화 속에서 공포감을 극대화시키는 오브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샤이닝>에서 주인공 잭이 점점 미쳐가는 모습을 거울이 조용히 비추거나, 불행한 미래의 예언이 거울을 통해 드러나게 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서늘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진실은 때로 숨겨야 할 때가 있고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이기도 하다.
성찰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Arvo Part)의 작품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을 들으면 명상을 하는 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단순한 음이 느리게 반복된다. 마치 동양화처럼 여백이 느껴지는 음악이다. 깊은 바닷속 느긋하고 조용하게 끊임없이 돌아간다는 소금 맷돌처럼 거울은 무심하고 소리 없이 나를, 우리를, 세상을 비출 뿐이다. 피아노가 바이올린을 바이올린이 피아노를 비추고 따라 하고 투사하면서 반복되는 음악. 거울을 바라보는 나, 거울 속에서 나를 쳐다보는 또 다른 나. 나를 오래 바라보는 거울은 언제쯤 나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 줄 수 있을까? 언제쯤 환한 세상이 열릴까. 아! 보고도 보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이여.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신의학자였던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거울단계 이론(The Mirror Stage)’을 집약한 말이다.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거울을 보아야 내 모습을 알 수 있듯이, 타인에게 비친 나를 살펴야 나의 내면, 나의 자아가 파악된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자아는 날 때부터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보듯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나’라고 하는 인식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지를 파악하면서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입냄새가 심하던 상사가 있었다. 자신은 몰랐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할 때면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입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집사람에게 내가 화를 냈지. 아니, 입냄새가 나면 난다고 내게 얘기를 해야 알 것 아니냔 말이야.”
어느 여인이 자신을 짝사랑한다고 생각한 남자가 있었다. 꽃을 사들고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런데 여자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다른 분들에게 하듯 친절하게 대했을 뿐인데... 사랑이라뇨. 오해예요.”
내가 생각하는 나, 나의 정체성, 나의 영혼이라는 것은 사회 관계망 속에서 형성되는 실체 없는 그림자, 무의식의 꼭두각시, 거울에 비친 영상이라는 의미에 수긍이 가다가도 타인이라는 거울이 꼭 정직하게 나를 비추고 있는 것인지? 혹은 타인에게 비친 나의 모습을 내가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가족오락관의 소곤소곤 귓속말 릴레이처럼 와전된 단어가 엉뚱한 의미로 바뀌어 버리듯, 우리는 각자 서로에게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이 되어 그 왜곡된 허상을 비추고 있지는 않는지, 타인에게 비친 영상을 어둡거나 오염된 안경을 쓰고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마음이라는 거울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데
이 큰 사랑이 어떻게 내 몸 안에 있을까
네 눈을 보아라, 얼마나 작으냐?
그래도 저 큰 하늘을 본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나는 작은데>이다. 우주의 티끌보다 작은 나의 몸에 사랑이 담기고 그보다 더 작은 눈 속에 우주가 비친다는 그의 노래는 ‘나’라는 인식의 경계를 피부 안쪽으로 구분 짓지 않고 그 너머 무한으로까지 넓힌다. 그의 시는 나의 목에 감겨서 조여오던 미움과 질시, 욕망과 집착의 동아줄을 느슨하게 풀어헤쳐 깊은숨을 쉬게 만든다.
루미의 시를 접하고 나면, 온갖 번뇌의 화산이 폭발하여 세상을 집어삼킬 듯 한 내 마음속의 혼란이 ‘나’란 존재가 ‘그리 대단하지 않구나’하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잦아든다. 내가 하찮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 작다는 생각, 나의 망념이 헛된 것이라는 인식 말이다. 세상 종말이 온 듯 괴로움으로 들끓는 용광로는 다만 찻잔 속 태풍처럼 사소한 것이었구나 하는 자각이 조용하게 찾아든다. 눈동자 속 조그만 동공이 거울처럼 큰 세상을 비추는 나란 무엇인가?
거울 속의 거울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본다. 광활한 창공을 담아내는 나의 눈과 세상의 소리를 모으는 나의 작은 귀, 향기와 냄새를 맡는 코와 쓰거나 달콤한 맛을 느끼는 혀, 바람과 물과 손길을 느끼는 피부. 오감을 하나로 모으는 인식. 이 모두가 거울이구나 하는 생각이 가만히 든다. 타인을 비추고 세상을 반영하고 우주를 드러내는 나는 거울인 것이다.
타인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나도 타인을 비추는 거울이리라. 우리는 모두 서로를, 세상을, 우주를 비추는 거울이다. 어두운 감정으로 상을 일그러뜨리지는 않는지, 분노로 형상을 왜곡시키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알아차려서 마음의 면을 고요하고 평안하게 유지하는 일. 이끼나 먼지가 끼어서 탁해지지는 않았는지 틈나는 대로 돌아보고 닦고 쓸어내는 일. 이 모두는 당신의 얼굴이 깨끗하고 맑고 아름답게 비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거울 속의 거울이 환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내가 외친다. “거실 통유리창은 언제 닦을 거야? 먼지와 잡티로 부옇다 못해 아주 더러워.” “응 조만간...” “맨날 조만간이라더니 벌써 유월이 다 되었어.”
아! 닦아야 할 곳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