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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이 내 세상

by 힉엣눙크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가 갑자기 경직된 얼굴로 식식거리면서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처음 나의 문제 제기는 사소한 것이었다.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하는 일이어서 상대가 누구였든 그렇게 요구했을 터였다. 바로 잡는 일에 시간이 많이 드는 것도, 품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에게 가볍게 요구했다. 이 부분은 고쳐서 처리합시다. 내가 이 말을 꺼냈을 때 그는 뱀처럼 싸늘해지면서 이빨을 드러냈다. 왜 하필 내가 해야 하나요.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봐. 그런 거죠. 젊은 그의 이성은 부재중이었고 눈빛은 형형했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상황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접한 나는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워 할 말을 잃었다. 나의 요구는 평범한 합리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무례와 무시, 사적 감정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악마에게 잠식되어 버린 그의 영혼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나니 억울하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분노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라는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처럼 그가 현재 존재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 대를 이어 내려온 분노 본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그의 화는 교감신경의 과잉이라는 특수성이 있을 뿐.


석가모니는 “마음속에 화를 품고 있는 것은 마치 자신이 독약을 마시고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설했고, 마크 트웨인도 "분노는 그것을 부은 곳보다도 담고 있는 그릇을 더 많이 손상시키는 염산과도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감정이라는 본능을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혀서 사회생활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슬기롭게 이를 조절해 내는 일은 자신을 위한 지혜일 터이다. 그의 갑작스럽고도 이해 불가한 격노는 진화와 유전자, 무의식의 작용, 분노조절 장애 때문이라 치부하며 내면에 끓어오르는 나의 분노를 잠재웠다.


직박구리 한 쌍이 우리 정원 라일락 나무에 둥지를 짓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부지런히 물어와서 정성스레 엮었다. 금세 둥지의 골격이 드러났다. 가만히 살펴보니 둥지 가운데에는 비닐봉지가 끼워져 있었고 희고 가느다란 비닐 끈도 하나 치렁하게 늘어져 있었다. 웨딩카에 매달린 깡통처럼, 영구의 코에 붙은 하얀 콧물 자국처럼 길게 장식되어 있었다.


둥지를 튼 직박구리 한 쌍은 지난겨울, 아내가 던져준 과일 껍질이나 과자 부스러기 등을 얻어먹으러 매일 찾아오던 녀석들이었다. 아내가 이른 아침 현관문을 열어젖히면 어떻게 알았는지 가까이 날아와서는 “찌이~익”거리며 시끄럽게 울어대고는 했다. 마치 “나 배고파. 밥 좀 줘~”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사람에 익숙해져서인지 우리가 곁으로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그렇게 제법 정이 들 무렵, 나뭇잎이 무성해지고 벌레들이 많아지자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발길을 뚝 끊어버린 직박구리가 조금 섭섭했지만 다른 먹을거리가 많아져서이니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한 쌍이 불쑥 나타나 우리 집 정원의 라일락 나무 위에 신방을 떡하니 차렸던 것이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들로 얽히고설킨 둥지를 가만히 쳐다보던 아내가 말했다. 정말 신기하지. 보고 배운 적도 없는데 어찌 저렇게 정교하게 만들어내는지 말이야. 참새, 나비, 금붕어... 저마다 각양각색의 삶을 살아내는 일이 당연하다 여겨지다가도 새삼 자연의 섭리에 놀라게 돼. 저 둥지처럼 말이야. 그치?


둥지를 만드는 새들의 행동은 자유의지나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호르몬의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기후와 절기에 따라 짝짓기를 하고 둥지를 만들고 알을 낳고 먹이를 물어와 새끼를 기르는 일련의 행위들은 개체의 유전자 안에 저장된 시나리오에 따라 펼쳐지는 일일 테지만, 외부의 자극이나 환경도 같이 맞아떨어져야만 한단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야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비단 동물들의 세계에만 국한된 일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법칙이 그렇듯 우리들의 다양한 삶도 여러 원인들이 서로 만나고 화합하고 상응해야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본능에 이끌리고 교육을 받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구축된 세상. 우리 각자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세상은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 만들어진 세상은 아닐까? 새들이 나무에 둥지를 튼 것처럼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 내가 보는 이 세상은 나 스스로가 얼기설기 엮어놓은 둥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본능에 더하여 상상과 감각과 추론과 오해 그리고 믿음이라는 재료들을 물어다가 차곡차곡 쌓아놓은 거대한 덩어리.


내가 주차를 하고 있는데 도로를 지나가는 한 남성이 내 차 앞에다 쓰레기를 창밖으로 휙 던지고 사라졌다. 내 눈앞에 그가 버린 쓰레기가 들어오자 나의 마음에 불쾌감과 함께 화가 치솟았다. 내 세상에 그의 쓰레기가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쓰레기를 버리고 간 그는 지금 나의 감정선을 건드린 사실도 모르고 자신의 둥지 속에서 다른 문제로 골몰해 있을 것이다. 그의 세상에는 이제 더 이상 그가 던져버린 쓰레기는 없는 것이다.


“쓰레기는 그냥 쓰레기통에 넣어.” 아내가 내 등을 두드리며 조용히 말했다.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이 눈앞에 존재하더라도 나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면 그것은 더 이상 내 세계에서 분노와 증오를 유발하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내면의 무의식이 던져 넣은 쓰레기를 자꾸 꺼내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세상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해하고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서로의 세상에 간섭하거나 영향을 줄 수 있다. 최종적으로 그 간섭이나 영향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나의 몫으로 남는다. 내 둥지의 일이고 내가 그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종종 주인은커녕 하인이나 노예로 산다. 스스로의 분노와 슬픔과 탐욕에 질질 끌려다니고 태질을 당하고 사슬에 묶인다. 쓰레기를 던진 사람은 떠나고 없는데 나는 그 쓰레기 때문에 기분 나빠하고 화를 내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아내와 나 그리고 둥지를 만든 직박구리.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각자의 우주 속에 있는 것이다. 여성인 아내가 바라보는 무심한 남편과 귀여운 직박구리, 남성인 내가 바라보는 무서운 아내와 성가신 새집, 조류인 직박구리가 바라보는 이상한 인간 부부. 그 셋이 바라보는 세상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마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의 등장인물들처럼 하나의 사건에 각각의 진술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둥지일 뿐이다. 지금 보이는 이 현실은 객관적 세상도, 누구의 세상도 아닌 바로 나의 세상이다. 들국화의 노래처럼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지구라는 별, 이 우주에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언젠가 내가 죽어도 지구상의 인류는 계속해서 삶을 영위해 갈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 우주라는 하나의 무대에 잠시 손님으로 왔다가 떠나는 주체가 바로 ‘나’라는 그와 같은 보편적 인식이 어쩌면 거대한 착각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나의 세상, 나의 우주, 내가 만든 둥지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우리는 모두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살짝 끼어든 우주의 교집합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세상은 유일한 우주인 것이다. 당신의 둥지처럼.


나를 불쾌하게 하고 나를 화나게 만든 날 선 ‘분노와 증오’, 툭 던져진 ‘쓰레기가 불러온 모멸감’이 내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몇 번 흔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스노글로브(Snow globe)처럼. 뿌옇게 흐려진 나의 세상, 나의 둥지는 어느새 조금씩 탁도를 낮춰가고 있다. 또 언제 흐려질지는 알 수 없지만 작게 흔들리고 덜 괴롭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전인권이 절절하게 부른 그의 노래처럼 나는 아직 세상을 모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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