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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금붕어

by 힉엣눙크

포악한 뱀이 순식간에 세 사람을 휘감았다. 옥죄어오는 거대한 몸통, 차갑고 미끈거리는 피부, 뼈를 으스러뜨리는 무자비하고 막강한 힘. 남성은 벗어나려 사력을 다 해 보지만 역부족으로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고 양옆의 어린 두 아들은 도움을 간구하듯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라오콘 군상>이다. 트로이에 목마를 들이지 말라고 경고한 제사장 라오콘을 벌하기 위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뱀 두 마리를 보내서 그와 그의 아들들을 질식시켜 죽게 했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근육을 뒤트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고 섬뜩하게 묘사되어 감탄이 터지는 명작이다.


그리스와 전쟁 중이던 트로이의 제사장 라오콘이 불길하고 미심쩍은 목마를 반대했던 것은 트로이 입장에서는 재앙을 모면할 기회였으리라. 하지만 포세이돈은 그리스 편에 기울어 있었기에 싹을 잘라 트로이의 패망을 돕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왜 인간처럼 화를 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고통받을까?


때로는 은혜롭고 때로는 가혹한 자연, 그 불가해한 경외의 대상을 마주한 고대 사람들은 어떻게든 설명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것이다. 자연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실체성 부여. 인간이 신을 만나게 된 계기이자 기원이었을지 모른다.


우리 정원 연못에는 금붕어 아홉 마리가 있었다. 커다란 날개를 가진 왜가리의 주둥이에 들어가려는 순간 내가 달려가서 구출해 준 ‘검정이’, 붉고 흰색이 어우러지고 지느러미가 고와서 수컷들의 구애를 한 몸에 받던 ‘예쁜이’, 제일 작고 앙증맞던 ‘꼬맹이’ 등등 특징에 따라 이름을 지어 불렀다. 아내는 머리에 노란 왕관을 쓰고 자그마한 주둥이를 앙증맞게 뻐끔거리던 ‘귀염이’를 특히 좋아했다. 자신들을 사랑해 주는 사람은 알아보는 것인지 아니면 먹이를 주기 때문에 따르는 것인지 금붕어들은 아내가 연못에 비치면 몰려들었고 손길도 피하지 않았다. 바로 옆 벤치에 앉아 그들의 먹이활동과 부드러운 유영, 귀여운 유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복잡하던 머릿속도 차분히 가라앉곤 했다.


며칠 전 이른 아침, 정원을 돌고 있을 때였다. 연못 옆을 지나치는데 비린내가 심하게 났다.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무릎 정도의 깊이, 지름이 두 발쯤 되는 원형, 어린 부평초와 부레옥잠이 몇 개 떠 있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연못.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수면에는 빛의 산란이 없었고 물은 맑았으므로 바닥까지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그런데 금붕어 아홉 마리가 있어야 할 그곳에 세 마리만 보였다. 나머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순간 서늘해지는 육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머리는 잘려 사라지고 절반만 남은 금붕어 사체 하나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놀라고 참담한 마음으로 한참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무언가가 다섯 마리를 잡아먹고 한 마리는 반쯤 먹다 버리고 달아난 것이었다. 속상한 마음을 추스르고 집게를 가져왔다. 건져 올려서 살펴보니 반만 남은 몸통이 살짝 뒤틀려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고통으로 몸부림쳤던 것이리라. 마치 <라오콘의 군상>처럼 말이다.


동물이나 식물, 심지어 돌멩이까지 마음을 주고 정을 붙이면 반려의 대상이 된다. 대상과 연결된 애착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커지기 마련이고 추억과 기억은 마음자리에 오롯이 한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세월의 무상함은 피할 수 없는 법. 불현듯 이별을 마주하게 되면 상처와 고통이 어김없이 찾아든다. 외부의 대상과 내부의 마음, 그 둘 사이에 연결된 그 무엇,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가느다랗고 길고 질긴 인연의 실은 행운과 불행 그리고 운명이라는 베틀의 북에 이끌려 우리들의 삶을 교직 한다. 똑같은 회색 양복 12벌을 남기고 떠난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처럼 인생은 어쩌면 빛바랜 이야기로 짠 직물 몇 조각만 남기고 사라지는 꿈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왜가리의 소행은 아닌 듯했다. 그들은 긴 주둥이로 물고기를 통째 삼키기 때문이다. 금붕어의 몸통이 이빨에 의해 잘린 것으로 봐서는 족제비일 가능성이 높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나는 연못 주위에 작대기를 세우고 줄을 촘촘히 쳤다. 왜가리라면 예방이 될 터이지만 족제비라면 어림도 없을 듯싶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도 없어서 일단 그렇게 대비하고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만하면 만족하고 물러서기를 바라면서.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연못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예쁜이, 검정이, 땅꼬마 세 마리는 부디 살아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연못은 텅 비어 있었다. 촛불이 꺼진 빈방처럼 캄캄했다. 금붕어들이 연못을 얼마나 환히 밝혀주고 있었는지, 또 얼마나 큰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에야 말이다. 연못에는 회색빛 적요만이 서글프게 남아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할 때 아내가 내게 연못 금붕어들의 안부를 물었다. 모두 사라졌다고 대답하자 울상을 짓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 속상하다며 이내 수저를 놓았다. 창 너머 물끄러미 정원을 바라보던 아내가 말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잔인한 모습을 드러내는 게 자연인 것 같아.”


적자생존의 자연 생태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잡아먹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먹고 먹히는 생명체들의 냉엄한 삶의 현장은 숲 속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생태계뿐만이 아니라 인간계도 마찬가지다.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모두 생존을 위한 전쟁을 각자 치러내고 있는 중이다. 퇴근 후 열패감이나 피로감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안도이고 다시 내일의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예언이다.


사람들이 때로는 순수한 동화처럼 때로는 아름다운 시처럼 노래하곤 하지만 삶의 기본 양태는 생존을 위한 엄혹한 전쟁이다. 입바른 소리, 올바른 도리를 얘기하는 사람, 그들도 언젠가 급박한 상황, 손익의 각축장으로 내몰리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제 무리를 위해서 당신을 밀치고 짓밟고 내동댕이칠 가능성이 높다. 이것 또한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욕심을 버리면 아름답고, 마음을 비우면 평화롭다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장삼이사 세속 사람들은 욕심도 마음도 쉬 비울 수 없고 훌훌 버리지도 못한다. 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지성의 상아탑이 높이 치솟았는데도 인간은 왜 우매한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비교적 평온해 보이지만 지금도 세상의 다른 땅에서는 같은 민족 끼리 피를 흘리며 싸우고, 같은 신을 섬기는 나라들이 서로 죄 없는 목숨들을 무참히 앗아가고 있다. 그 또한 우리가 모르는 오묘한 신의 섭리일까?


자그마한 연못을 만들고 금붕어를 기르는 우리의 인공 생태를 진짜 자연은 냉혹하게 대했다. 마치 뱀을 풀어 제사장 라오콘을 벌한 포세이돈처럼. 인류에 의해 급속히 파괴되는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는 우리에게 엄중히 되묻고 있다. 라오콘 부자처럼 감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죽음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지혜롭게 난관을 극복하고 공존과 평화를 구가할 수 있을 것인지를.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신 없는 인간은 있을 수 있으나 인간 없는 신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한 어느 종교학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선택의 갈림길에 신들도 함께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원 라일락 나무에 흰 비닐 끈을 치렁하게 장식하고 알을 낳았던 직박구리 한 쌍이 오늘 드디어 새끼를 이소 시켰다. 아직 주둥이가 노르스름한 새끼는 어미 새 크기만 해져서 제법 잘 날아다니고 있다. 새로운 삶을 꾸려 갈 아기 새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날아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 날개에 희망의 실을 덧대어 본다.



뜨거운 여름날 바싹 마른땅


벗인 양 찾아든 반가운 장대비 시원한 바람


‘땡그랑’ 정원에 걸린 풍경의 파안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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