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후숙의 시간

by 힉엣눙크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한 마리 양처럼 정원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있었다. 풀을 뜯는 행위가 양들에게는 즐거운 식사시간이지만 나에게는 고단한 노동이자 인고의 시간일 뿐이다. 언젠가 풀 뽑는 게 힘들다고 푸념하는 내게 누군가 염소를 풀어놓으라고 제안했던 일이 떠올라 코웃음이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고오오옹~ 크와아앙~ 따당 탕탕’ 귀를 파고드는 소음이 불쾌감을 불러왔다. 시 외곽의 한적한 도로, 그곳으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오토바이들의 굉음이 쩌렁하게 울렸다. 폭주족들이었다. 무애의 자유, 사회에 대한 반항, 분출하는 아드레날린. 허락되지 않는 쾌락을 즐기려는 그들의 무모한 젊음은 목숨을 담보로 내걸 만큼 대책이 없었다. 불안정한 상태, 사회적 소외감에서 오는 공격성,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욕망의 질주는 시트를 높이고 머플러에 구멍을 내고 엔진 소음을 최대로 키운다. 차를 선택할 때 '승차감'보다는 뭇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낄 수 있는 '하차감'이 중시되는 세태 속에서 그들은 왜소한 자존심, 상처받은 영혼을 풍선처럼 크게 부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알파 메일(Alpha Male)을 향한 본능이 그들을 몰아붙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탈자들을 기다리는 건 어쩌면 오메가나 아웃사이더의 삶일 가능성이 크다. ‘나 무시하지 마. 부아앙~ 타당탕탕!’ 그들의 아우성에는 불만과 불안이 가득 차 있지만 세상은 의무와 고통과 인내라는 멍에를 차갑게 씌우려 들뿐 그들의 감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고령의 어르신은 청각에 문제가 있는 듯싶었다. 마치 싸우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크고 쩌렁쩌렁 울렸다. 반면에 여직원의 말은 그 속에 파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결국 가녀린 소리를 점점 크게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통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청력이 약해진 노인들에게 왜 보청기를 끼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보청기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이고 그것을 끼는 것이 귀찮은 일이기도 하며 대화를 나눌 사람도 곁에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댄다. 그 노인이 떠나고 나자 사무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조용해졌다. 잘 들리지 않게 된 사람에게 타인은 점점 더 멀어진다. 고함을 내질러야만 하는 대화는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들리지 않는 소리, 점점 작아지는 나. 그는 왜소해지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데 애써 힘을 쏟아야만 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지금은 구부정하고 힘이 없지만 나도 옛날엔 키가 크고 날렵했지. 피부는 매끈해서 사람들에게 잘 생겼다는 소리도 들었어. 눈치가 빠르고 영민해서 높은 지위에도 올랐어. 나 젊을 땐 잘 나갔단 말이야!’ 그가 떠나며 외친 몇 마디는 잔향으로 남아서 사무실을 떠도는 듯했다. 내면의 자아가 작고 초라하고 상처받기 쉽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웅크리게 되고 작은 것에도 쉽게 화를 내거나 고함을 지르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는 일종의 행위예술가다. 기다란 끈에다 서류 종이를 만국기처럼 붙여서 가로등 사이에 달아놓기도 하고 회전로터리 한가운데에 무속인의 집에나 세워질 법한 울긋불긋 장식한 대나무를 꽂아 두기도 한다. 큰 도로변에서 목이 쉬어라 고래고래 소리치는 그 사람은 잊을만하면 나타났다. 그가 외치는 소리의 진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서워 피하거나 혀를 끌끌 찼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음모이고 의도이다. 자신이나 자신의 무리에게 벌어지는 나쁜 일들과 불리한 결과는 모두 미리 계획된 모략이라는 생각 말이다. 음모론에 휩싸인 사람은 자신의 패배와 실패의 이유를 음모 탓이라 여기며 그것을 통해 왜소하고 상처 입은 자신을 위무한다. 그에게 세상은 온통 음모의 도가니인 것이다. 신(神)과 정보기관과 적대국과 악감정을 품은 누군가의 음모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그는 살기 위해,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서 음모를 까발린다. 피킷을 들고 현수막을 붙이고 유인물을 나눠주며 고함을 지른다. 생각의 한 귀퉁이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음모론에 오랫동안 강하게 사로잡히면 편집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의 세상은 거미줄 같은 음모가 판을 치는 곳이고 자신은 피해자이다. 그래서 그는 며칠 뒤에도 같은 자리에 서서 만국기 같은 유인물을 덕지덕지 붙인 채 크게 소리칠 것이다. ‘이건 음모야!’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는 세상, 실패와 좌절이 새로운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보다는 나락의 길이 되기 쉬운 사회, 일상의 행복과 여유가 속도에 내몰리고 잠식당하는 가정, 고통과 망상 그리고 자책에 시달리며 외면받는 개인. 그 속에서 누군가는 고함을 지르고 굉음을 울리며, 싸우고 벌거벗고 음모를 탓한다. 또 누군가는 돈과 종교에 미치고 술과 마약에 찌들고 도박과 육욕과 질투와 분노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그 난장판 위로 마음의 평화를, 세상의 아름다움을, 신의와 사랑을 만국기처럼 예쁘게 꾸며서 치렁하게 붙여 놓고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외치면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일까?


취객이 허전한 마음을 안고 번쩍이는 광고판을 단 화려한 술집에 들어갔다가 바가지요금에 털리고 나오면 악질 고객과 까탈스러운 상사 그리고 갚아야 할 대출금 걱정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는 다음날 쓰린 속과 깨질 듯한 두통 그리고 한 움큼의 후회를 가슴에 쓸어 담아 넥타이로 질끈 봉하고 출근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살아야 하고 살만한 세상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아침 해가 구역질을 유발해서 끈적한 토사물을 앞사람의 무릎에 쏟아 놓으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댈 수 있는 사회, 끈끈한 유대가 형성되는 인간적인 곳이라 여겨질 것인가?


공개된 자리에서 누군가가 노스님에게 삶의 괴로움을 호소했다. 그러자 망설임 없는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뜨거우면 놓아라.”


그처럼 쉬운 답과 명쾌한 길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왜 괴로워하는 것일까? 알아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좌절과 환희, 우울과 의심, 상실과 욕망의 자리에서 울고 웃으며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실이라 믿으면서. 백만 스물한 번을 쳐도 멈추지 않는 양철북 토끼처럼 말이다.


내면이 고통으로 소리치고 고함을 내지른다면, 이전의 소리보다 크고 시끄러워졌다면,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자. 그 원인이 자존감이 아니라 왜소한 자존심을 붙들고 있지는 않는지, 남들과 비교하면서 초조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과거의 상처와 얼룩, 미움과 분노에 너무 오래 머물고 있지는 않는지 가만히 들여다보자.


어른이 된다는 것, 보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내 속을 들여다보면서 나 스스로를 달래고, 어둠에서 벗어나고, 기운을 차리고, 가볍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외부로 발산하는 힘과 고성과 호통이 아니라 겸손과 겸양과 용서의 힘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이뤄지는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회에서 참 어른을 보기가 어려운지도 모른다.


정원에 있는 비파나무의 열매를 수확해서 맛을 보았더니 아직 설익어서 시금털털했다. 그릇에 담아서 놓아두었다. 며칠 잊고 지내다가 다시 꺼내 보았더니 어느새 샛노랗게 잘 익어 있었다. 껍질을 벗겨서 입에 쏙 넣고 우물거리자 입안 가득 향긋한 냄새가 났다. 시고 밋밋하던 맛이 달콤하게 변해 있었다. 마주 앉아서 먹고 있던 아내가 말했다.


“사람도 후숙이 필요한 법이지. 내가 당신한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불친절하게 대한다고 툴툴대지 마. 다 큰 뜻이 있어서 그런 거야. 당신 스스로 익어가는 시간, 후숙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얌. 쩝쩝... 음 맛있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개똥의 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