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 집에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였다. 정원의 꽃과 나무를 둘러보고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상 걱정, 자식 걱정, 돈과 건강 걱정, 온갖 것들이 만화방창했었다. 그러다 누군가 한숨 쉬듯 얘기했다. “저기 가지에서 재잘대는 참새처럼 아무 걱정 없이 살았으면...” 뒤에 말은 생략되었지만 아마도 ‘행복하고 싶은데 잘 안되니까 그게 문제지.’라는 뜻이었으리라. 옆에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참새도 나름의 고충이 있어. 차라리 돌이 되는 게 나아.” 그러자 다른 사람이 이어받았다. “돌은 좀 싱겁지 않아? 콘크리트는 어때? 원칙대로 만들면 수명이 아주 길어. 로마시대 판테온 돔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는데 아직도 멀쩡하잖아. 이천 년도 넘었는데 말이야.” 또 다른 이가 받았다. “오래 남아서 뭐 하게. 메멘토 모리, 가볍게 살자고.”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카르페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말인데 고대 로마 공화정 시절 개선식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고 시내를 행진한다. 거리마다 도열한 시민들이 뜨겁게 환호를 보내고 높은 건물에서는 꽃잎을 뿌렸으리라. 그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탄 마차의 뒷자리에는 일부러 노예를 태워서 낮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계속 되뇌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 세상 다 가진 것 같이 우쭐하던 개선장군의 귀에 그 소리는 아마도 “지금의 감정에 속지 말라. 너는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할 인간임을 항상 기억하라.”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숲 속에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 파랑새를 따라가서 발견한 것은 과자로 만든 집이었다. 언제나 돌아서면 배가 고팠던 시절, 과자로 만든 집이라는 설정은 어릴 적 내게 강렬한 환상을 안겨주었다.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면서 그 즐거운 공상 속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곤 했다. 하지만 과자로 만든 집, 그 속에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제 발로 찾아오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가 살고 있었다. 현실에서도 그처럼 달콤하고 짜릿한 것들이 혈당을 올리고 뱃살을 늘리며 건강과 생명을 위협한다. 이와 유사하게 고통과 고뇌로 가득한 이 세상, 달콤한 과자의 나라를 찾아 먼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오늘은 허무하게 지나가 버리곤 한다.
반복되는 일상. 쌓이는 스트레스와 외로움. 끌려다니듯 피동적인 일상이 지속될 때면 우울해진다. 삶이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열대야에 잠 못 들고 몸을 뒤척일 때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그러자 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경구를 떠올린다는 것은 지금 내 마음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래서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무언지 알 수 없는 헛헛함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수단을 동원하며 몸부림치는 중이라는 것을.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종이 인간이라고 한다.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곧 허무함에 빠져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즉,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뭣하러 열심히 살 것이며 자식은 낳아서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 말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맹렬하게 문명을 꽃피우고 대대손손 자녀들도 낳으며 잘 살아왔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과학자 바르키와 브라워 두 사람은 그 이유를 인간의 ‘부정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인류가 죽음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순간 ‘부정’이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법을 체득했기에 별문제 없이 그 모순을 해결하며 계속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머리로는 죽음을 인식하지만 ‘부정’이라는 본능 덕분에 평소에 그 문제를 잊어버린 채 열심히 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부정본능’, ‘자기기만’ 때문에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내일 사라질 존재들이 오늘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 또한 인간의 초상이지 않는가. 그 불꽃이 타는 자리에는 후회와 고통이 이글거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숙명적으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숨이 막힐 듯 뜨겁고 습한 공기, 물 위로 피어나는 수증기. 온천수로 가득 찬 욕조에서 물을 한 바가지 떠 몸에 끼얹는다. 뜨거운 기운에 움찔 놀랐다가 일어서서 발끝을 물속에 가만히 담그면 피부에 닿는 열기가 따갑게 느껴진다. 천천히 몸을 낮춰 더 아래로 가라앉는다. 열탕 속의 물이 내 몸을 말없이 받아준다. 이윽고 머리만 남긴 채 온몸은 욕조에 푹 잠긴다. 화끈거리던 열기는 어느새 나의 몸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고 미끈거리는 온천수는 기분 좋게 나를 감싸 안는다. 편안한 기분으로 나른해지면 졸음이 몰려오고 나와 온천수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물과 나, 나와 물은 물(水)아일체가 된다. 어쩌면 이러한 느낌이 진정한 행복의 경지인지도 모른다.
행복을 찾고 소유하고 느끼려 한다면 지금 나는 행복하지 않은 것일 테고 행복은 나의 바깥에 있는 그 무엇쯤 일 것이리라. 온천수 속 알몸, 무방비로, 아무 걸림도 없이 물속에 푹 잠겨서 나를 잃어버리는 바로 그 순간. 깊이 ‘몰입’한 무아의 경지, 아무것도 생각할 틈이 없는 바로 그 상태.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유한성을 자각하며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가지려 하고, 집작 하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스르르 놓아주고 풀어버리는 바로 그 순간, 나의 일상은 그저 행복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허리가 아파. 나 대신 화분에 물 좀 주면 안 돼?”
더위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생각이 잠겨 있던 나를 향해 창밖에서 땀을 흘리며 풀을 뽑던 아내가 로마의 개선장군처럼 우렁차게 외쳤다.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고 양봉하는 사람처럼 모기장 옷을 입은 아내의 모습. 마치 투구와 갑옷을 걸치고 로마군의 검 글라디우스를 손에 틀어 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렇게 일을 하는데 당신은 뭐 하고 있느냐’는 듯 노기가 서린 목소리가 나를 화들짝 깨웠다.
미안한 마음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어느새 해는 지고 노을빛이 붉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하늘에 따스한 조명이 켜진 것처럼. 한낮의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는 밋밋하게 잘 드러나지 않던 꽃빛이 초록잎들을 배경으로 하나하나 또렷하게 살아나 있었다. 영상 매체의 비비드 모드를 적용한 것처럼 꽃들이 정원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떠올랐다. 태양빛이 수평선에 느긋하게 누우면 빛의 입자들이 대기에 흩어져 따스해지는데, 사진가들은 이때를 ‘골든아워(golden hour)라고 부른다. 해가 떠오르거나 지는 때는 세상의 영묘한 색상들과 숨겨진 아름다움이 베일을 벗고 살며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생각도 근심도 기쁨도 없는 찰나와 같은 그 순간의 아름다움. 그 황홀함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꽃빛이 살아나는 시간이구나.”
망상과 탐욕, 집착에 사로잡혀 자각하지 못할 뿐, 어쩌면 우리 인생은 ‘꽃빛이 살아나는 시간’ 인지도 모른다. 잠시 아름답게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존재들이여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때면 되뇌자. 메멘토 모리. 물뿌리개로 화분에 물을 주면서 나는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