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을 떼. 무릎 올려! 좀 더 버텨! 철봉에 매달린 아이들을 향한 선생님의 호령이었다. 오래 매달리기. 1분여 그 짧은 시간이 무한처럼 길게 느껴지던 일. 철봉의 시큼한 쇳냄새가 관자놀이에 펄떡이는 맥박의 냄새인양 비릿하게 올라왔고 부들거리는 팔에서는 극심한 고통이 아우성쳤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근육은 점점 힘을 잃었고 어떡하든 턱을 철봉 위로 올리려고 목을 늘이고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탈락’이라는 선생님의 호령에도 못 들은 척하며 매달린 채 시간을 벌어 보려는 아이들의 처절함. 살아 있다는 것,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악착같이 질긴 것, 오래 참아야 하는 그 무엇이다.
어릴 때 혼자 집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집 잘 보고 있어. 어디 놀러 가지 말고. 숙제부터 하고. 착하게 있으면 나중에 맛있는 거 사다 줄게.” 엄마는 장을 보러 가고 아무도 없는 빈집. 무생물만 남은 공간이 불러오는 적막은 여느 때와 다른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불러왔다. 혼자서 딱지를 접고 상대 없이 구슬을 잘그락거렸다.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고요를 깨뜨리면 나는 고둥 껍질을 찾아 들어가는 집게처럼 골방 안으로 깊이 숨었다. 시계 종소리가 여섯 번 울리고 날은 점점 어두워져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과 외로움을 참아내면서 더디 가는 시계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엄마가 대문에 서서 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 긴 시간을 나는 울음을 삼키며 견뎌야 했다.
기억을 소환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를 가고 군대를 가고 회사에 다니면서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어딘가를 지향하며 참고 또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공책에 단어를 빼곡히 채워서 제출하고 터널을 통과하듯 문제를 풀고 시험을 쳤다. 소금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고 유격장으로 향하고 사표를 품고 직장에 출근하기도 했다. 몸집이 커진 집게는 발가벗고, 연약하고, 상처 입기 쉬운 붉은 몸뚱이를 감추기 위해 딱 맞는 고둥 껍질을 찾아 그 속으로 숨어든다. 나는 새로운 환경 또 다른 관계를 형성할 때면 알맞은 껍데기 속에 부끄럽고 유약하고 외로운 영혼을 감췄다.
조용한 방 한가운데 테이블이 놓여있고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마시멜로 한 개가 접시에 담겨 있다. 어른이 말한다. “15분 뒤에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이걸 먹지 않으면 하나를 더 줄게.” 어른이 방을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즉시 먹어버리는 아이, 몸을 꼬고 접시를 건드리고 마시멜로를 만지작거리다가 이윽고 날름 입속에 넣어버리는 아이, 용케 참아낸 후 약속대로 하나를 더 받아내는 아이. 1970년 미국 스턴퍼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월터 미셸 연구팀이 진행한 마시멜로 실험이다. 이 실험이 유명해진 것은 후속 연구 때문이다.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을 오래 추적 조사해 보니 자제력이 강했던 아이들은 커서 성적도 좋았고 사회에서도 성공하는 확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한때 자제력, 참을성이 과도하게 강조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아이들의 장래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전투기 조종사라면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훈련이 있다. 바로 중력가속도 훈련이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받는 중력은 1G라고 한다. 반면 전투기가 회전하거나 급가속할 때 느끼는 중력은 최대 6 ~ 9G까지 치솟는데 자신의 몸무게의 6 ~ 9배의 힘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압력이라고 한다. 이때 뇌와 안구로 가는 혈액이 하체로 쏠리면서 시야가 어두워지거나 실신을 하게 된다. 당연히 전투기는 추락을 피할 수 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공군 조종사들은 6G 이상을 견디는 내성 훈련(G-Test)을 정기적으로 받는다고 한다.
헤어지자는 말에 첫사랑 그녀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불투명한 미래, 좀처럼 걷히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너무 오래 헤맸다.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 당신이 원한다면.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둬. 난 당신을 놓아주지만 그건 오로지 바보 같은 너를 위해서야. 그게 내 사랑의 이유이니까.”
내게 생이란 갑자기 빈집에 홀로 남겨진 아이, 마시멜로 접시를 바라봐야 하는 실험실 아이, 정신없이 뱅뱅 돌고 급변하는 인생의 회전목마에서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전투기 조종사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참고 기다려도 마시멜로는 추가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동항법모드로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랑을 잃고 갈등을 겪고 사회의 비정함에 가슴이 문드러진다. 급가속 급회전을 반복해야만 하는 인생의 고통 가속도는 삶이 끝날 때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오래 매달리기. 극도의 고통과 근육의 피로, 내 몸무게는 체감 6G를 넘어서고, 다이어트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해 봐도 팔은 점점 떨릴 뿐이다. 조금만 견디면 마시멜로를 맛볼 수 있는데, 더 기다리면 장에 가신 엄마가 곧 돌아올 터인데. 매달린 채 남들보다 더 오래 버텨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놓을 수 없고 놓아서도 안 되는 기대와 두려움 그리고 공포가 뒤엉킨 이 생생한 꿈 속에서 견디고 있는 나. 언제쯤 매달린 철봉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내가 틀릴 수 있고 당신은 그럴 수 있다는 진심, 진리를 인정하는 용기와 미망을 버리는 결단, 그 길 위에 서서 오래 견딘다면, 길게 참아낸다면 이윽고 당신을 만나 사랑의 이유를 듣게 될까. 놓아주고 풀어주고 용서할 때 진실한 사랑의 이면, 숨겨진 진심 그리고 영혼의 자유를 발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