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명품을 훔치고 가출을 하다

by 힉엣눙크

100억을 호가하는 국내 최고가 어느 아파트에는 입주민들만 이용할 수 있는 사우나 시설이 있는데 근래 여자 사우나 탕 안에서 인분이 여러 차례 발견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또 그 이전에는 사우나에 비치된 공용 샴푸나 바디워셔 등을 빈 통에 담아 가는 일이 종종 발생해서 어메니티 공급을 중단하는 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화지체 현상이란 가치관, 종교, 규범 등 비물질문화의 변화 속도가 기술을 포함한 물질문화의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빈곤국가였던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어서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우리 내부의 졸부근성, 문화지체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음을 슬며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몇 년 전 미국 부호의 상속녀이자 셀럽인 어느 유명인이 옷을 훔치는 도벽이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평생 휴지를 사용하듯 명품을 사들여도 다 못 입고 죽을 만큼 돈이 많은 사람이 왜 훔치는 기행을 벌이는 것일까.


백만장자 상속녀, 고가 아파트의 거주자, 평범한 서민까지 사람들은 모두 급속히 발달한 인류문명의 졸부들이다. 벌거벗고 다니던 인간이 언어를 획득하고 거대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지만 아직도 인간의 몸은 구석기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작은 부족 단위로 수렵 채집을 하던 그 습성과 본능이 부지불식간에 문화적 교양과 규범을 뚫고 불쑥 드러나는 것이리라. 인류는 천상에서 뚝 떨어진 고매한 존재가 아니라 진화를 거듭해 온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개미왕국 같은 문명 속에서 떠돌이의 본능, 채집의 유혹, 사냥의 충동을 억누른 채 학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영리한 동물일 따름이다.


어느 날 우리 집 정원에 놓아 둔 모종삽이 사라졌다. 영국 시싱허스트 가든을 방문했을 때 기념으로 샀던 것이라 내가 아끼던 물건이었다. 늘 보관하던 장소에 있어야 할 그것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나의 의심 레이더가 전광석화처럼 작동했다. 나무 손잡이, 나무토막, 나무 의자 등등 깨물 수 있는 것들을 이빨로 물어서 아작을 내곤 하던 반려견 은달이는 그 물건을 탐냈다. 근질거리는 이빨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녀석의 동물적 충동이 금지의 선을 넘어버린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때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심하게 야단을 쳐 혼을 냈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저지르다니. 순간 분노의 혈류가 안광을 가렸다. 오냐오냐 하니까 나를 아주 우습게 보는군. 이제 개자식한테까지 무시를 당하다니! 나는 확신에 차서 은달이를 불렀다. 헥헥거리며 달려온 녀석의 해맑은 눈은 손잡이를 이빨로 작살내고도 모른 채 하는 엉큼한 눈으로 보였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영악한 놈이 있나. 어쩜 이렇게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붙잡고 외쳤다. “모종삽 어떻게 했어? 내가 아끼던 그 모종삽을 어떻게 했어? 어서 말을 해!” 좌우로 흔들며 큰소리로 야단치던 그때였다. 창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아내가 말했다. “그거 어제 내가 사용하고 뒤뜰에 나뒀나봐. 왜 착한 은달이를 범인으로 몰고 난리야! 말 못 하는 짐승이 무슨 죄가 있어!” 아내의 두둔과 해명에 설움이 북받쳤는지 주인의 느닷없는 성냄에 놀랐는지 은달이는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달아났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뒤뜰로 향했다. 산책로에 호미와 함께 그 모종삽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은달이를 불렀다. 그런데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무서워서 구석에 숨었나 싶어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녀석은 없었다. ‘아. 가출을 했구나.’ 아내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마을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 아내는 계속 ‘은다알~, 은달아~’ 외치며 애타게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이웃 주민들이 나와서 함께 은달이를 찾아주었다. 마을 앞 논길에 어슬렁거리는 녀석을 발견한 어느 주민이 어르고 달래서 우리 쪽으로 몰아 돌렸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은달이를 꼭 껴안아 주었고 주위에 몇몇 마을 사람들이 눈물의 해후에 박수를 쳤다. 개 한 마리를 기르는데도 온 마을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애지중지하던 모종삽은 중국산이었다. 몇 년이 지나 은달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난 후 그 사건이 제일 미안했다. 이후 자주 쓰는 물건이 원래 있던 자리에 없어지거나 어디론가 사라지면 나는 때로 아내를 의심했다. “은달이가 없어지니 이제 내가 모두 뒤집어쓰네. 아 서글퍼.” 그렇게 아내의 과장된 하소연이 이어졌다. 나는 왜 이토록 쉽게 의심하고 남 탓을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착각이 하나 있다. 바로 자신이 옳다는 믿음이다. 나는 정상인데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다거나, 나는 착한데 너는 나쁘다거나, 나는 맞지만 너는 틀렸다는 생각 말이다. 제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을 가지지 못한 사람, 성찰의 시간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증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그런 의식의 기저에는 생명체가 제 삶을 영위하려는 본능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흐물거리는 세포 덩어리가 중력을 이기고 달리는데 효율적인 척추를 갖게 되었듯, 인류는 험난한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이 사실이라는 믿음을 운명처럼 떠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관찰과 느낌을 의심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개체들은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사라졌지만 작은 신호나 단서에도 사실이라 속단하고 빠르게 행동하는 개체들은 살아남아서 지금의 자손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섣부른 착각, 걱정, 두려움은 생존의 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의 질서, 유전의 결과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인류 문명이 위대한 것은 카니발리즘, 자연의 고난, 야만의 폭거에 저항해 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야성의 생태계를 벗어나 인간관계망 속에 살고 있는 지금은 속단하는 습성이 서로에게 독이 되기도 한다. 성급한 의심, 경박한 행동, 사악한 말, 모략을 저지르고도 나는 정당하다고 그래서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뻔뻔한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본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나의 말과 행동은 곧 나 자신의 됨됨이다. 타인을 쉽게 의심하고 헐뜯고 무시하고 모함하는 자는 아무리 고급 옷을 입고 비싼 차를 타고 고등한 지식을 입에 걸쳐도 싸구려 인간일 뿐이다.


‘자신이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타인을 존중하라. 사랑을 받고 싶다면 사랑을 하라. 행복하고 싶다면 스스로 행복하라.’ 이 말은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처럼 너무나 당연하지만 사람들은 분노와 미움 그리고 질시와 복수심에 휩싸여서 쉽게 잊고 자주 망각한다.


내 안의 확신과 의심과 속단이 당신에게 상처 주지 않기를, 당신의 불신과 편견과 아집이 나를 흔들지 않기를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8월의 마지막날에 가만히 기원해 본다. 고우나 미우나, 알든 모르든, 다가올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지혜도 너와 나 기대어 있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움틀 것이기에.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랑의 이유, 견디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