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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류로 살아가기

by 힉엣눙크

그제는 할머니의 기일이었다. 흩어졌던 옛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세상의 일과 서로의 안부가 넘나들었고 이런저런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밤이 저물고 급히 제사상이 차려졌다. 음식을 나르고 병풍을 세우고 지방을 붙였다. 모두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집사인 동생이 향에 불을 붙이고 잔을 가져왔다. 제주인 내가 빈 잔을 쥐었을 때였다. 술을 따라야 할 집사가 동작을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아뿔싸, 술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술은 제사의 시작과 끝이다. 조상을 모실 때 술을 따르고, 절을 하기 전에 술을 올리며,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통해 조상의 음덕을 나눈다. 술을 마시지도 못했던 조상의 제사일지라도 말이다. 동생은 급히 술을 찾아서 튀었다.


사회자가 말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의 국기를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석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섰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그런데 단상에는 있어야 할 태극기가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사람들은 모두 빈 무대를 향해 두리번거려야 했다. 항상 단상 위에 붙박이로 놓여 있던 태극기는 하필 다른 행사 때문에 옮겨졌었고 행사 준비자들은 까맣게 그 사실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그날의 해프닝은 두고두고 조직 내에서 회자되었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 단양 군수로 부임한 뒤 저 바위들을 보시고 "비 온 뒤에 솟아난 옥빛 대나무순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옥순봉입니다.“ 충주호 제트보트 선장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렸다. 며칠 전 엠티에 따라갔을 때의 일이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옥순봉의 바위는 정말 푸르스름해 보였다. 돌이 푸른 것은 아마도 지의류가 바위를 덮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리라.


바위에 마치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보이는 지의류(地衣類)는 이끼와는 다른 종이다. 균류와 조류의 공생체인데 균류는 조류를 싸서 보호하면서 수분을 공급하며, 조류는 동화작용을 하여 생성된 양분을 균류에 공급한다. 균류와 조류가 따로 있다가 서로 만나 지의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생체로 하나의 개체를 이룬 독자적 생물이다. 나무나 바위에 붙어서 자라며 사막에서부터 극지방까지 지구상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먼저 자리를 잡기 때문에 ‘개척자 생물’이라고도 불린다.


신비스럽게 푸른색을 띤 옥순봉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차 안,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가 물었다. ”혹시 신조로 삼고 있는 사자성어가 있어요?" 한자를 배웠던 구세대도 아닌 삼십 대 초반의 직원이 던진 질문은 예상을 벗어났기에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의아했다. ”아니, 난 없는데. 염두에 둔 사자성어가 있어?" ”지금은 맘에 드는 적당한 것이 없어서 찾고 있어요. 예전 시험준비를 할 때 ‘우공이산(愚公移山)’을 교훈으로 삼았었죠. 바보처럼 묵묵히 참고 해 나가면 언젠가 합격의 날이 올 것이라고 그 사자성어를 떠올리며 견뎌냈었죠.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헤쳐갈 좌우명이나 금과옥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먼 항해에 길을 잃지 않도록,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뭔가 단단한 것을 자신의 내면에 새겨 넣고 싶었으리라. 옥순봉 아래 퇴계가 써서 새겼다는, 지금은 충주호 물속에 잠겨 있는 ‘단구동문(丹丘洞門)’ 네 글자처럼.


70 ~ 80년대 먹고살 만해진 집에서는 없던 족보를 만들거나, 거실에 서예 글씨로 가훈을 적어서 액자로 걸어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가화만사성’, ‘소문만복래’, ‘고진감래’ 등등 비슷한 문구들이 내걸렸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큼지막한 액자를 옆구리에 끼고 귀가하셨다. 거실에 걸린 글자는 ‘무괴아심(無愧我心)’이었고 맨 끝에 퇴계라고 쓰여 있었다. ‘부끄러움 없는 나의 마음’. 명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인 유기의 글에서 유래된 것이다. ‘혼자 있을 때도 삼가 경계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신독(愼獨)’과도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윤동주 시인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노래했건만 나는 ‘무괴아심’ 액자 앞에서 그저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고 지금도 다만 부끄럽다. 욕망에 이끌리고 분노에 떠밀려서 알량한 자존심을 부여잡은 채 못나고 어긋난 생각과 행동을 하늘의 별만큼 저질러왔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천적에게 쫓길 때면 머리만 파묻은 채 숨었다고 착각하는 타조처럼 뻔뻔하고 어리석게 세상을 살아왔던 것이다.


‘차카게살자’, ‘일심(一心)’, 화살이 꽂힌 심장. 어릴 적 목욕탕에서 간혹 보곤 했던 조폭들의 문신이었다. 스님의 삭발한 머리, 신부의 로만 칼라처럼, 법(法)보다 우리 곁에 더 가까이 있었던 주먹들도 나름의 신념을 지켜내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탈사회적 표식이 필요했었나 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자신의 아내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영화다. 아내가 살해되던 날 사고의 충격으로 기억이 10분 이상 지속하지 않는 환자가 되어버린 레너드는 복수를 향한 일념으로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끊임없이 메모를 하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 하지만 돌아서면 모든 것이 리셋되는 두뇌. 내 몸의 바깥에 있는 것들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레너드는 가슴에 새겨진 글자를 읽는다. ”내가 해냈다(I'VE DONE IT)"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이미 이뤄진 것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곧 그 사실도 잊어버린 채 되뇐다.


“내가 어디 있었더라?”


사실 기억은 왜곡되고 변조된다. 인간의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을 오래 간직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화된 기능이라고 한다. 미래의 위험에 대응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반추동물처럼 뇌의 해마가 단기기억을 끄집어내어 끊임없이 되새김질하여 장기기억 저장소에 보관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기억은 조작되고 변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느 생물학자는 ‘인간은 지의류다’고 말했다. 사람 역시 순수한 개체가 아니라 장내 미생물, 피부 미생물, 바이러스 DNA,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까지 포함한 초유기체(superorganism)로 존재하는 생명체이니만큼 몸 자체가 하나의 공생체를 이룬 지의류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리라.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체, 서로의 존재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미토콘드리아’와 하나가 되고 ‘장내 미생물’과 한 몸이 되어 나의 욕망과 감정과 생각이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득히 잊고서 말이다. 그래서 아리안 순수혈통을 숭배했던 독일 나치처럼 오만하고 어리석게도 인간은 공생체가 아니라 순수하고 독립된 개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간다. 자유 영혼이 대장균 따위에 영향을 받을 수는 없다며 그 사실을 부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장내 미생물은 사람의 세포 숫자보다 1.3배 더 많은 39조 개에 달하고 사람의 유전자보다 20배 더 많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할 때 우리의 몸이 곧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에 잠식당할 것이라며 히스테릭한 망상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건강한 사회공동체에 필수적인 다양성을 위험하다 여기고 부정하려는 사람처럼.


나라는 개인, 우리라는 집단은 제사에서 술을 빠뜨리고, 행사에서 국기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기억의 왜곡과 변형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빠진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처럼 문신을 하듯이 신조와 가훈과 사훈과 국정기조를 액자로 걸어둔다. 개인과 집단을 망라하고 사람들은 모두 소중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또 귀중한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식을 필요로 한다. 걸어둔 것조차 잊고 지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레너드의 짧은 깨달음처럼 간절히 바라는 모든 것들은 멀리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이뤄져 있는 그것, 나와 당신이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는 바로 이것은 아닐까? 욕망과 아집의 장막을 걷어낸다면, 퇴계 선생의 가르침 ‘무괴아심’처럼 항상 부끄러움을 경계하고 돌아볼 수 있다면 말이다.


“지금은 언제고 여기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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