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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거짓말 나의 착각

by 힉엣눙크

“예술의 세계는 참 알 수가 없네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인데 어느 유명인이 높게 평가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가격이 오르지를 않나. 또 어떤 재력가가 특정 화가의 작품을 사 모았더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뭐 주식 시황도 아니고 일종의 사기 아닌가요?” 찻잔을 들며 후배가 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의 세계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치 특정한 의도나 농간, 우연에 따라 평가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를 거친 후 취업전선, 육아와 직장생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근심과 고통이 숨 쉴 틈 없이 휘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일반인들이 예술을 깊이 향유한다는 것은 사실 힘든 일이다. 게다가 현대 예술의 탈재현성, 모호성, 사전 지식의 필요성 등 높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대중에게 예술이라는 것은 마치 뜬구름 잡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대중과 예술의 격차와 소외는 예술을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한 현상이 냉소적인 인식을 불러오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이 인터뷰에서 그랬다잖아. ‘예술은 사기다’라고. 예술이 지니는 속성을 말했을 수도 있고, 예술계의 허세와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의미였을 수도 있겠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허탈해하는 그를 보며 내가 대답했다.


돌연한 그의 질문은 내 마음속에서 계속 파문을 일으켰다.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사물에 있나 아니면 내 머릿속에 있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 아니면 내가 느끼는 주관적 그 무엇일 뿐인가? 동서양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까?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질서, 균형 그리고 비례와 같은 형식적인 요소가 사물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자연이나 예술품에는 아름다움이라는 객관적 실체성이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 감동을 느끼게 된다고 보았다. 18세기 낭만주의 이후부터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미의 핵심으로 내세우기도 했지만 말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사물에 드러나는 외적인 형식미나 실체성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적 아름다움 그리고 관찰자와 사물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중시 여겼다. 사물이 주는 아름다움이란 고정된 실체성에 있기보다는 감상자의 시각이나 상황, 여건, 주변 환경의 변화와 관계 속에서 상호 조화를 이룰 때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서민들이 사용하는 밥그릇일 뿐이었다. 평범하고 실용적일 뿐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지도 않았다. 그런 조선의 잡기(雜器), 밥이나 국을 담을 때 쓰던 생활 용기 막사발이 임진왜란 전후 일본으로 건너가자 상황이 180도로 달라졌다. 일본 특유의 미의식 와비사비(わびさび}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상으로 숭앙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앞다투어 물건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임란 때 끌려간 조선의 도공은 높은 대우를 받았다. 조선의 어느 이름 없는 도공이 생계를 위해 무심하게 빚었을 막사발이 ‘기자에몽 이도다완(喜左衛門井戸茶碗)이라는 이름을 얻어 일본 국보 제261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교토 다이토쿠지 코호안에 소장되어 있다 한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일본의 도자기들은 경박하고 시끄럽고 덕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졌으리라. 하지만 명청 교체기 중국산 도자기를 구하기 어렵게 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시각은 달랐다. 그들은 중국 도자기의 대안으로 일본 도자기를 선택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17세기 유럽에 일본 도자기를 들여오자 일대 파란이 일었다. 최고급 도자기로 대우받으며 부자들의 컬렉션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포장지로 쓰였던 일본 판화 우키요에(浮世絵)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심어주었고 화풍에 영향을 주기까지 하였다. 우키요에를 그대로 베껴서 그린 화가도 있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였다.


인상파 화가들이 활동하던 당시 그들의 작품은 평단과 대중들로부터 외면과 멸시를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현대 예술이 대중들과 물과 기름처럼 부유하고 있는 지금, 근대 미술, 특히 인상파 화가들은 오늘날 대중들에게 크게 사랑받고 있다.


예술이 '사기'가 아니냐고 물었던 후배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만큼은 자신의 거실에 걸어놓고 있다. 예술은 지구를 한 바퀴를 돌고 한 세기를 지나야 사랑을 받기도 한다.


청나라의 첫 공식 유럽 대사였던 궈쑹타오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 클래식 교향악단의 연주를 감상할 기회를 얻었다. 음악회가 끝난 후 초청했던 관계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감상평을 물었을 때 그의 반응은 뜨악했다. “마치 수백 마리의 파리가 앵앵거리는 것 같다”라거나 “시끄럽게 싸우는 것 같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제일 처음에 아주 짧게 연주했던 곡이 그나마 들을 만했소.” 그가 말한 음악이란 연주자들이 공연을 시작하기 전 악기를 조율할 때 내던 소리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과 미의식도 지역과 문화와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심미적 상대주의 때문에 예술은 우리 내면이 저지르는 일종의 '사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움이 객관적인 형식으로 사물이든 인간의 마음이든 그 속에 실존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개인과 시대와 교육과 문화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보든 누가 듣든 동일한 아름다움을 느껴야만 하지 않을까?


"조각상은 이미 대리석에 완성되어 있다. 나는 단지 조각상을 가두고 있는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냈을 뿐이다." 다비드 조각상이 세상에 드러나자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는지를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대답이었다.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감정이나 미의식과 무관하게 사물에 내재된 속성이라고 그는 주장했지만, 자신의 욕망, 각고의 노력으로 성취한 기술, 무엇보다 내면의 심상과 예술성이 없었다면 찬란한 그의 예술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사물은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아름다움이 사물에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믿음이자 착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대상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것인가. 어둠과 빛, 무색무취의 공허만 남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바깥의 사물에 실재하는 것도 아니요 내 안에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의 모양과 색상과 소리와 느낌 속에서 일정한 질서와 비례와 조화를 찾아내는 그 무엇이 머릿속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리라. 사물과 마음이 서로 관계 맺을 때 가슴속에서는 새로운 전율이 일어난다. 우리의 내면에 일렁이는 불꽃, 바로 아름다움이다.


오늘날에는 전시장에 커다란 돌을 갖다 놓고 “이 대리석 안에 다비드 있다.” 하면 예술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마르셸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를 뒤집어 놓고 '샘'이라 이름 붙인 작품처럼 말이다. 미켈란젤로에게도 현대 대중들에게도 그것은 모종의 '사기'처럼 느껴지리라.


삶은 행위의 궤적이다. 운명적 결정과 환경적 요인이 비빔밥처럼 섞이고 서로의 감정들이 칵테일처럼 혼합하여 드러나는 화학적 결과물. 애증의 드라마와 각본 없는 연극이 펼쳐지는 이야기 한마당이다. 삶에 내재된 형식미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고통과 관계의 변주곡. 그러한 인생이 왜 예술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서일까 인생과 예술은 주관과 객관, 의도와 속임수, 우연과 필연 속에 피어나는 '사기'일지도 모른다.


사람에 속고, 관계에 울고 운명에 농락당하는 우리 인생의 '사기극'. 속고 속이는 상관관계. 고통의 너울, 영광의 광휘가 교차하는 숙명의 길 위에 당신은 서 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Who are you?)“라는 질문을 미국인들에게 던지며 한국의 선불교를 서구에 알린 숭산 행원 선사. 그 질문으로 벽안의 제자들을 가차 없이 몰아붙였다. 이름도, 고향도, 출신학교와 소유물도 자신이 될 수 없고 신체, 기억, 생각도 결국 자신이 될 수 없음을 계속된 문답으로 타파해 버렸다. ’나‘라는 생각과 '나의 것‘이라는 인식도 알고 보면 속임수고 '사기'라는 것을 매몰차게 일러주었던 것은 아닐까?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욕망 기계‘다. 욕망의 꿈틀거림을 동력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생존하고 번식하려는 욕망의 덩어리. 욕망은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서 ’나‘라는 주체를 강력히 필요로 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내세우는 이유는 사회관계와 문화로 직조된 옷을 스스로 입고서 고상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누군가 혼자만 생존해 있다면 선과 악의 개념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인간이 가진 덕성은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나며 타인에게 선하게도 악하게도 지각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이.


현대 뇌과학 및 심리철학에서 떠오르는 주요 관점 중 하나는 ’나(self)'라고 하는 인식은 뇌가 만들어낸 일종의 허상(Illusion) 또는 내러티브(Narrative)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경험, 기억, 감정, 인지기능 등 수많은 부분으로 나뉘어 병렬적으로 작동하지만,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정보를 하나로 묶어서 운용될 필요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인간의 행동과 생각은 뇌의 다양한 기능과 무의식의 작용에 의해 결정될 뿐인데 ‘나’라는 의식이 대변인 또는 변호사처럼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결정한 것인 양 말이다. 타인에게 멀끔하게 보이는 ‘나’는 사실 꼭두각시이고 ‘사기’ 일 수 있다. 너울거리는 불꽃의 아름다움. 마치 예술품처럼 말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을 포기한 순간부터 굉장히 자유로웠어요.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예술을) 하는 거지요.”


백남준 선생이 생전에 남긴 고백처럼 인생의 '사기'를 벗어나는 한 가지는 바로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곧 비판과 성찰로 내 삶의 척추를 바로 세우는 일이자 거짓을 버리고 세상을 얻는 일 말이다.


영화관 좌석에 앉은 당신. 팝콘을 먹고 콜라를 마시며 스크린을 응시한다. 이윽고 시작된 영화. 울고 웃는 당신의 마음은 무엇에 매혹된 것인가? 고정된 스크린 위에 실재하는 것은 빛과 그림자, 색과 모양이 빠르고 은밀하게 변하는 마술, 사물과 의식이 벌이는 탱고, 스토리텔링의 '사기'. 우리는 지금 인생이라는 한 편의 예술, 영화 속에 흠뻑 빠져있는 것이다.


짭짤하고 재미있는 당신의 ‘인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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