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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특별한 이유

by 힉엣눙크

“타격감이 좋아”


초로의 경상도 남자가 툭 던진 한마디였다. 나이에 비해서 동안이고 젊게 입고 다녔기 때문에 그가 육십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종종 놀라곤 했다. 직장 생활과 사업으로 바쁘게 살아오다가 제2의 인생을 걷고 있는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한 번 잡은 말의 주도권은 잘 놓지 않았기에 이야기는 일방적으로 흐르기 일쑤였고 오래 지속되었다. 그날도 몇 명이 앉아 잡담을 나누던 자리였다. 그가 불쑥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팀장을 보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맵싸게 쏘는 성격도, 그렇다고 얌전하거나 조용한 성격도 아니었다. 밝고 활달하지만 다소 엉뚱한 말로 사람들을 웃기곤 했던 김팀장. 그녀는 졸지에 누군가의 타격감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남자였다면 아마도 쉬 꺼내지 못했을 말이었다.


김팀장 면전에서 던져진 그의 돌출 발언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무례한 발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그가 말했다. “요즘 유행어예요. 리엑션이 좋고 반응이 재미있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더군. 김팀장이 좋아서 한 말이요. 허허”


‘타격감’이란 사물이나 도구에 사용되어야 하는 말이다. 당사자인 김팀장도 유쾌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웃고 넘어갔지만 그날의 일은 목에 가시처럼 걸려 간간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람을 샌드백에 비유하는 표현을 본인 앞에서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라고 바로 잡지 못한 것이 아쉬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매사에 이렇게 한 템포씩 느리다. 아... 이건 아닌데 하다가 화제가 바뀌어 버리면 말할 기회를 놓쳐서 후회하는 일들 말이다. 순발력 있게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해소하고 풀고 바로잡는 일에 능하지 못하니 돌아서서 곱씹다가 이처럼 글로서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선함이나 재치, 세련된 면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무난한 성격이 나에게는 편안했다.”


내가 이 소설의 첫대목을 읽었을 때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나의 친구나 친척 혹은 주변에서 흔히 보는 남자들의 생각과 별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 밥 멕여주냐? 시간 지나면 다 정으로 사는 거지. 평범하고 착한 사람을 만나. 그래야 편해” 이렇게 얘기하던 어느 선배의 얼굴도 떠올랐다.


소설이 한 동안 잊혔을 때 벼락처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쏟아지는 기사들 속에서 그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대한 외국인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어느 외국 여성의 “처음 읽자마자 분노가 치밀었어요.”라는 말을 접했을 때는 여성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성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지질하고 멍청한 남편이 너무 화가 났다.”는 언급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왜냐면 그 도입부를 읽었을 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성이 화를 낸다는 게 다소 의아했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그런 말을 떠드는 사람,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봐왔고 또 지금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인들 그중에 남성들은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일까?


개인의 존엄과 개성을 무시하는 행태, 자신의 아내를 단지 도구로만 여기는 태도, 주체성을 외면하는 그 남편의 이기적인 자세가 같은 남자가 봐도 머저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거울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비춰보고 고칠 수 있어서이다. 한강의 소설과 이를 통한 외국인들의 반응은 얼마나 내가 일상 속 내재된 폭력에 무감각해진 만성질환자인지를 돌아보게 했고 또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서구인들의 감상과 느낌에 뜨끔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양 남성들이 여성을 보호해야 할 존재, 양보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그 자체가 또 다른 차별이자 위장된 가부장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사도 정신에서 유래한 ‘레이디 퍼스트’란 말은 애정이 넘치는 배려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성들에게 보상이나 특권을 주는 대신 남성이 더 강하다는 것을 슬쩍 드러내며 주도권을 가진 계층임을 은연중에 확인하고 유지하려는 성향을 내보이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일종의 온건한 가스라이팅이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그 속에 안주하려는 여성들도 그 프레임에 갇히기는 매 한 가지이긴 하지만 말이다.


비단 남성과 여성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회 내에 만연한 폭력성과 억압의 문화, 집단과 단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며 길들이려는 움직임과 분위기에 구성원들은 부지불식간에 무뎌지고 동참하며 공범이 되고 또한 스스로 희생자가 된다.


만일 주변의 사람들이 평범하거나 무난하고 또 나보다 못나기를 은연중에 바란다면 그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파시스트이거나 사람을 도구로 여기거나 그들을 방패막이 혹은 희생양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면에 저마다의 색깔과 개성, 그리고 특성을 드러내고 찾아내고 장려하고 싶고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일 때 미국 공군은 조종사들의 신체 치수를 측정한 평균값을 기준으로 비행기 안전벨트를 제작했다고 한다. 평균적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두루 무난하리라 본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 치수에 맞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너무 꽉 끼어서 조종장치나 계기판을 조작하기가 불편했고 다른 누군가는 너무 헐거워서 안전벨트가 제 구실을 할 수 없었기에 위험한 상황이 초래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종사들의 불편과 위험성에 대한 호소가 제기되자 길버트 다니엘스 소위를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되었다. 결론은 ‘평군적인 인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허상이 누구에게도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심지어 위험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평균의 오류’를 깨달은 미 공군은 안전벨트를 포함한 조종 장비들을 개인의 신체 조건에 맞춰 조절 가능하도록 개선했다. 그것이 오늘날 차량, 의자 등에 적용된 인체공학과 디자인 철학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고 한다. 평균에 모든 사람들을 끼워 맞추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위험하며 폭력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그 사람 참 특이해. 정말 독특해.” 튀는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가 종종 하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일종의 비난과 멸시의 언사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평균의 인간, 무난한 사람’이 아닌 나름의 특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만 모를 뿐이다. 저는 평범하며 튀지 않고 나름 똑똑하며 무난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실 여러모로 이상하고 문제 투성이의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생활에 보다 약고 능수능란해서 저만의 색깔을 슬쩍 숨기거나 묻고 지나가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미 공군의 ‘평균의 역설’처럼 사실 평범하고 무난한 사람은 없다. 다들 크건 작건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들이다.


‘초록은 동색’, ‘유유상종’처럼 서양에서도 비슷한 뜻으로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끼리 무리를 짓는다(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라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끼리끼리 편을 짓는 것이 인류의 공통 속성이리라. 그 편에 속하기만 하면 저마다의 독특함을 숨기거가 죽이면서 평범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자기편이 되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이 된다. 차별과 배제와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의 개성을 발견할 수 없거나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그는 집단주의 문화나 관습에 자신을 맞추거나 적응한 것이리라. 마치 중국 여성의 ‘전족’이나 우리나라의 고대 풍습 ‘편두’처럼 억지로 ‘기형화’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양이라면 모욕으로 여길 ‘무색무취’라는 비유가 일종의 칭찬으로 여겨지는 우리 사회에서 그 말을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안타깝고도 불행한 일일 수도 있다. “그 사람 무난해” 이런 말을 듣는 당사자는 채식주의자의 영혜처럼 폭력에 길들여지고 스스로 그 굴레에 맞추고 자신의 개성을 은연중 숨기며 살아온 굴종적인 사람은 아닐까?


특별한 취미도 독특한 재능이나 기호, 그리고 취향도 없음을 쉽게 토로하고 부끄럼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마주할 때면 조금 슬퍼진다. 목재(木材)를 얻기 위해 일렬로 심어서 쭉쭉 곧게만 자라난 편백숲처럼 전체주의 문화에 경도된 획일적 사회가 떠오르고 또 그 모습 속에서 은연중에 내 자화상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개성과 색깔이 존중받고 이해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 남다르고 특이하다는 평가가 모욕이나 비난이 아니라 칭찬으로 인식되는 공동체,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그런 땅을 꿈꾸어본다.


아침에 마당에 나섰더니 온통 은빛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간밤에 기온이 뚝 떨어져서 강한 서리가 내렸던 것이다. 싸늘한 냉기가 옷 속을 파고들 때 뜨거운 피를 순환시키는 내 몸이 하나의 유기체임을 뚜렷이 느꼈다. 바스락거리는 갈잎과 차가운 서리의 촉감이 발바닥에 와닿을 때 나와 지구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되었다. 차가운 돌과 흙의 감촉을 느끼며 걷고 있을 때 “톡.. 토독“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지붕 끝에 매달린 빗물받이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막 떠오른 햇살에 얼었던 이슬방울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냉정하고 차갑고 시린 은빛의 서리가 햇빛이 닿는 순간 일제히 녹아내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의 서리, 우리 가슴속 얼음, 서로의 냉기도 때가 되면 이처럼 덧없이 녹아내릴 것이라는 생각이 새벽 사찰의 범종소리처럼 깊게 울렸다. 이내 심장이 따뜻해지고 가벼워지면서 시린 손 끝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크게 내쉬는 숨결이 밥솥의 김처럼 하얗게 날렸다. 붉고 노란 정원이 당신처럼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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