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음악도 없고 특별한 분위기도 없는 저가 프랜차이즈 커피숍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떠들고 있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듯게 되었다. "그 사람 참, 다 늙어서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 있잖아요. 거기 딱 들어맞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웃자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랄 총량의 법칙은 그냥 농담이 아닙니다. 사실 근거 있는 얘기예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심리학과 ‘지라르’ 교수의 연구 결과입니다. 그의 이름 ‘지라르’를 따서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평소 입담이 세고 말발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동료들은 그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믿어 주는 것 같았다. 몇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시고르자브종‘은 요즘 유행하는 우스갯말로, '시골 잡종‘을 외국의 고급 견종처럼 들리도록 발음을 변형한 언어유희다. 그런데 누군가 시치미를 뚝 떼고 진지하게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학교 육종학자 '시고르 자브‘ 교수가 개발한 견종이라고 우긴다면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속아 넘어갈 것이다.
'지랄 총량의 법칙‘은 김두식 경북대 교수의 저서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사용한 후 널리 회자된 말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사춘기에 다 써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년에서야 뒤늦게 피우기도 한다."는 속설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으로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커피숍 그 남자가 말한 영국의 ‘지라르’ 박사도 당연히 허구다. 누군가의 썰에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요즘 그런 유형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사무실에 찾아오는 나이 많은 고객들 중에서 엉뚱한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유튜브를 통해서였다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 몇 년 전부터 그런 현상이 증가하기 시작한 듯하다.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 전통 언론 매체들은 이제 ‘레거시 미디어’라 불린다. 인터넷, 유튜브, SNS 등 ‘뉴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미디어가 독점하던 기능을 분담하거나 대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산, 유물을 뜻하는 ‘레거시’를 붙여서 낡고 구식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기존 미디어가 힘을 잃고 있다는 방증이다. 유튜브 등을 통해 아무나 방송국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미디어를 더 많이 찾고 있다. 문제는 그들의 정보가 신뢰와 공정성을 중시하는 ‘레거시 미디어’처럼 잘 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갖 거짓, 억측, 막말 그리고 음모론등 ‘가짜뉴스’가 세상에 널리 퍼지고 있는 중이다.
202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튼’ 교수는 AI의 대부로 불리는데 일반인공지능(AGI)이 개발되면 인류는 3단계를 맞이할 것이라 말한 바 있다. 1단계는 ‘거짓과 진실의 차이가 소멸’되고, 2단계는 ‘인간의 할 일이 소멸’되며, 3단계는 ‘인간이 소멸’된다는 섬뜩한 경고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시점은 1단계인 ‘거짓과 진실의 차이가 소멸’되는 시기이다. AI가 만든 글, 그림, 음악, 사진 그리고 영화 등은 사람이 직접 한 것과 구별이 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고 무엇이 진짜인지를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또한 AI 알고리즘이 불러오는 확증편향과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탐욕은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있어서 진실여부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제프리 힌튼’ 교수의 1단계가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된 것이다.
가짜뉴스의 주요 타깃은 아마도 연예인일 것이다. 관심과 선망의 대상, 사랑과 미움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망설’, ‘이혼설’, ‘충격 비밀’ 등 자극적인 내용의 가짜뉴스는 높은 조회수나 클릭률로 금전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기에 이를 탐하는 사람들의 좋은 표적이 된다. 또한 유튜브나 SNS의 알고리즘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부추겨서 확산을 더욱 빠르게 만든다. 인권 침해는 물론이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심각한 결말을 가져오기도 한다. 왜 사람들은 타인의 사생활을 궁금해하고 뒷담화를 즐기는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그녀의 저서 <철학의 쓸모>에서 이 세상에는 3대 사회악이 있다고 말한다. 그중 첫 번째가 쓸데없는 수다로 상대를 진저리 나게 하는 ‘투머치토커(too much talker)’다. 남들이 관심도 가지지 않을 자신의 사소한 이야기나 남의 험담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 사람 말이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흉보고 헐뜯고 깎아내리거나 타인의 사적인 비밀을 발설하는 행위는 어찌 보면 인류의 오래된 습성이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애서 역설적으로 뒷담화 때문에 인류의 언어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남 말하기를 유독 즐겨하고 타인에 대한 사적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 드물게 있다. 타인을 깎아내리는 행위를 통해 상대적으로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느낌을 가지려는 것인데 이는 불안정하고 낮은 자존감을 회복시키려는 방어기제라고 한다. 또한 자신의 단점이나 죄책감을 다른 이에게 투사함으로써 자기를 합리화하려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뒷담화를 나누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우리만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의식 때문에 그들끼리는 유대감과 결속력 강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 뒷담화는 집단 전체의 신뢰를 저해하고 결속력을 약화시키며 생산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많은 연구결과에서 밝혀졌다. 습관적으로 남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성격적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으며 타인으로부터 가벼운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쉽다고 한다. 집단은 물론 본인도 망치는 길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역사가였던 플루타르코스는 “비난의 말을 즐겨하는 사람보다 비난의 말을 즐겨 듣는 사람이 더 사악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험담은 와전되고 과장되고 왜곡되기 십상이다. 결국 그 대상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뒷담화로 이뤄진 ‘밈’은 전염병이나 기생충처럼 우리의 말과 생각과 뇌를 떠돈다. 그것을 듣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사람은 기생충의 숙주 노릇을 하는 셈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어쩌면 우리에게 뒷담화의 유통과정에 연결고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아닐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최악은 ‘불링'을 하는 사람이다. ‘불링(bullying)’’이란 약자나 소수에 대한 반복적인 위협이나 괴롭힘을 뜻한다. 소문이나 가짜뉴스를 접하고 그 대상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놀리는 사람 말이다.
요즘에는 ‘사이버불링’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SNS에서 조롱이나 욕설, 혐오의 댓글을 달아서 상대에게 큰 고통을 안기는 것이다. 자신의 가학적 욕구를 해소하는 통로로 여기거나 올바름을 실천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면 멍청하고 잔인한 짓을 벌이는 것이다. 망상에 젖고 공감력이 떨어지는 철부지의 작은 돌멩이는 현대판 마녀사냥이 되어 누군가의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불가에서는 사람이 몸과 입, 그리고 생각으로 짓는 그 모든 행위를 업(業, 까르마)이라고 한다. 자신이 저지른 업은 언젠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지은 대로 받고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원리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저질러 온 그 수많은 업보, 그중에 입으로 지은 구업(口業)을 나는 다 어이할 것인가? 가만히 돌이켜보니 부끄럽고 죄스럽고 또 두렵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반대로 행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양기가 입으로 쏠려서인지 나도 자꾸 말이 많아진다. 어서 빨리 한 살이라도 더 먹기를 바라며 설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며칠 뒤면 슬프게 또 한 살이 더 늘어난다. 어릴 때는 맞바람이 불어서 시간이 더디 흘렀다면 지금은 뒷바람이 불어서 떠밀리듯 세월을 타고 간다.
차가운 바람 속에 더욱 푸르른 앞산의 소나무처럼 단아한 말과 행동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하는 겨울이다.